임의변개 할 수 없는 예배
구약성경 마지막 책, 말라기 본문은 하나님의 심각한 책망과 질문이 이어집니다. 말라기서가 끝나고 세례요한이 나타날 때까지 300년동안 말씀을 거두실 것이기에, 하나님께서는 마음에 불이 타는 심정으로 강권, 책망, 가르침을 반복해서 드러내십니다. 그 중심이 무엇입니까? ‘예배의 문제’입니다. 예배를 통해서 전능하신 하나님을 만나고, 그의 능력을 힘입어 세상을 이기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야 할 터인데, 지금 너희가 가고 있는 이 길이 무엇이냐?를 묻는 것입니다. 아들은 그 아비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함이 마땅할것인데, 아비이고 주인이신 그 하나님을 공경하고 두려워함이 어디에 있느냐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저들은 항변합니다. 우리가 주의 이름을 언제 멸시하였나이까? 반문하고 항의합니다. 제사를 드렸고, 예배를 받지 않았느냐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저들을 향해 ‘문을 닫아라.’고 진노하십니다. 문을 닫는다는 것은, 더 이상 저들과의 관계를 멈추시겠다는 뜻입니다. 저들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저들은 제사를 드리면서도, 그저 제사의 형식과 제도적인 틀만 유지한 채, 마음에 귀찮은 것을 억지같이 행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성경은 이를 어떻게 표현합니까?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함이니라.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버렸다’고 표현합니다. 하나님의 눈앞에서 드려지는 예배의 실패는, 하나님앞에 죄악을 범하는 것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당시의 백성들이 하던 변론들, ‘언제 우리가 하나님을 버렸는가?’라는 말은 오늘날도 동일하게 반복됩니다. 코로나로 인해 뒤숭숭한 세상가운데 영상으로라도 예배를 드리면 되는 것 아닌가? 자세가 조금 편해 보이고 복장이 자유로와 보여도, 귀로 설교를 들으면 되는 것 아닌가? 이러한 자유로운 생각들이 곧 여호와의 눈앞에서 악을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형식적인 신앙, 모양만 흉내내는 예배를 싫어합니다. 우상이 아니시고 살아계신 참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형식적인 예배는, 하나님께서 지극히 가증스럽게 여기시는 것입니다. 마음이 함께 드려지지 못하는 온전한 예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없이 소리로만 대화하는 사람, 얼굴 보며 별로 길게 이야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마음이 떠난 사람하고 함께 있고 싶지 않은 것, 당연한 것입니다. 결혼을 하고서도, 옛날애인을 생각하는 남편이 있다면, 함께 한 이불을 덮고 자면서도 무의식중에 다른 여자의 이름을 부른다면, 그러고도 애를 낳고 산다면, 그런 이의 부인은 어떤 생각을 할까요? ‘껍데기하고 사는 기분이 들더라’고 고백합니다. 밥해줄 마음도, 같이 살 마음도 전혀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마음이 다른 곳에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몸은 주의 전에 와 있고, 입술로는 주여 주여를 외치는데, 마음은 예배를 번폐스럽게 여긴다면 이는 하나님께 가증한 것이 됩니다. 그의 눈앞에서 악을 행하는 것입니다.
코로나가 창궐하는 이 시기에는 이러한 현상들이 더 짙어졌습니다. 마켓은 들르고 직장은 출근해서 종일 일하면서, 유독 1시간 교회에 출입하는 것은 아주 예민하게 반응합니다. 교회가 모든 면에서 훨씬 안전함에도, 종말시대에 마귀가 좋아할 일만 하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시기에 현장예배에 온다면, 그저 ‘와 주는 것 만으로도 감사해라’는 수준이 될 때가 많습니다. 처음 예수님을 믿을 때는 그런 마음으로라도 오는 것이 귀중합니다. 그러나 아이가 어릴때는 밥투정을 하며 먹어주는 것 만으로도 엄마를 기쁘게 할 수 있지만, 후에 장성하여 학교갈 나이가 되었음에도 아침부터 밥투정을 한다면 돌아올 것이 야단밖에는 없을 것입니다. ‘제발 예수 믿으세요. 그래서 내가 믿어주었는데, 또 뭘 더 기대하느냐?’는 수준에 머물면, 안타깝고 복이 없습니다. 언제쯤 ‘순종, 헌신, 사명, 충성 등’과 같은 주제를 가지고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겠습니까? 기대할 수 없습니다. 결국, 세상에 매인 복없는 종살이 인생에 머물고 말 것입니다.
코로나로 인한 잘못된 또 하나의 예배행태는, 영상예배의 확산으로 인해 ‘정한 시간 정한 장소의 예배’를 변개한 것입니다. 성경이 정한 예배의 시간과 장소가 아니라, 자기 마음대로 정한 시간과 장소에 대해 부단한 자유가 주어졌다는 생각입니다. 교회가 처음 현장 예배를 드리지 못할 때는 사람들이 긴장감 가운데 온라인 예배앞으로 모였습니다. 교회에 가는 것과 동일한 단정복장을 준비하고, 헌금예물을 정성스레 준비해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갈수록 달라지더라는 것입니다. 점차 복장 자율화가 이루어지고, 나중에는 시간의 효율적 사용이라는 미명하에, 교회가 정한 시간과 다른 임의의 시간을 정하는 것입니다.
예배의 실제영상이 언제라도 볼 수 있도록 저장 준비되어 있으니, 반드시 교회가 정한 시간에 예배할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마치 소비자가 물건을 취하듯, 주일이어도 밝은 대낮에는 실컷 오락을 즐기다가 휴식이 필요한 시간이 되어서 예배영상을 오픈해서 예배한다는 것입니다. 언제라도 드리면 되지 않느냐는 생각에 예배의 모습들이 훼손 타락하기를 시작한 것입니다. 예배 받으시는 하나님이 중심이 되지 않으시고, 예배자의 선택이 중심이 되는 예배가 되었습니다. 뭔가 문제가 있지 않습니까?
또 다른, 코로나로 인한 잘못된 예배의 형태는, 주일성수 개념의 혼돈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민교회들의 인터넷 현장성은 한국교회의 화려하고 좋아보이는 그 속도전을 따라갈 수 없습니다. 게다가 4천여개 이민교회 가운데 이런 현장성을 살려서 영상을 만들 곳도 많지 않습니다. 더불어 한국의 경우에는 목회자의 숫자와 영상예배의 조건들에 있어서 풍성합니다. 비교 불가합니다. 그 결과 어떤 분들은 자신들이 한국의 주일 온라인 예배를 이곳 미주에서 드린다고 합니다. 그날이 언제입니까? 이곳에서는 토요일 저녁입니다. 토요일 저녁에 주일 예배를 영상으로 드리고, 은혜받은 것으로 치부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대단히 큰 잘못입니다. 날짜를 임의로 변개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북이스라엘의 여로보암이 자기마음대로 정한 날짜에 예배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나라와 개인과 가정에 결코 복이 되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지적들, 형식적 예배, 마음없는 예배, 임의변경하는 예배의 시간과 장소의 문제 등에 대해, 과연 오늘날 이 세대의 반응은 어떠한가? ‘왜요? 이렇게나 저렇게나 예배하면 되지 않는가요?’ 굉장히 무서운 말입니다. 예배의 실패가 가져올 인생의 허망함을 언제 어떻게 회복할 수 있겠습니까? 자기마음대로 정하는 시간과 장소의 예배, 날짜를 마음대로 변개하는 예배, 하나님이 결코 받지 않으실 것입니다.
코로나 시기에 임시적이고 제한적인 예배로 드리는 영상 예배를 분명하게 정의해야 합니다. 교회밖의 예배는 언제나 한시적이고 제한적인 것임을 강조해야 합니다. 번폐스러워서 해 치우는 예배로 하나님을 만홀히 여겨서는 안됩니다. 마음대로 시간과 장소를 변개할 수 없습니다. 모든 축복의 길로 나아가는 통로가 예배밖에 없습니다. 예배가 무너질 때, 인생각자의 영혼, 가정, 가문, 자녀, 민족, 삶의 전영역에 대해 하나님은 귀를 막고 눈을 감으실 것입니다. 차마 그 죄와 악을 보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코로나 온라인 시대에도 온전한 예배가 드려지는 참된 교회와 성도의 영혼에 하늘의 신령한 복과 땅의 기름지고 좋은 복이 넘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