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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의 형성과 방법론

- 쉴라이어마허와 바르트를 중심으로-


1. 생애

신학자의 신학 형성과 사상을 알기 위해서는 그의 생애를 간략하게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쉴라이어마허는 종교개혁자들의 복음적 그리스도교가 개신교 정통주의 정신으로 변해 신학을 체계화시킨 교리와 신조들이 계시와 신앙을 대신하거나 동일시 될 때 종교의 공통근거는 경건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경건을 인간의 직접적이며 근본적인 그리고 선험적인 ‘나’라는 주체의 자의식으로 이해 하였다. 이것은 아는 것나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자아의식으로 나타나는 감정인 ‘하나님 의식’과 ‘절대의존의 감정’이다.

바르트는 쉴라이어마허이후 현대신학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로서 하나님의 계시로서의 ‘말씀의 신학’(Theology of the Word)을 주창하였다. 그의 대표적인 작품인 「교회 교의학」을 통해 자신이 추구하던 키에르케고르나 쉴라이어마흐등의 관념론적인 철학용어들을 새로운 신학용어들로 바꾸어버렸다. 이로써 그는 성서교의학의 주창자가 되었으며 신학 방봅론으로는 변증법적 신학을 전개하였다. 그가 사용한 대표적인 신학용어들로는 예수는 승리자(Jesus ist Sieger), 절대타자(Der ganz andere)등이다.

1) 쉴라이어마허

쉴라이어마허(F. Schleiermacher, 1768-1834)는 계몽주의가 한창 꽃을 피우던 18세기에 태어나 활동을 하였다. 독일 브레스라우(Breslau)에서 헤른후트파인 경건한 군목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렸을 때 고전을 공부하였으며 그리스도의 수난과 죄인이 받을 형벌의 문제로 많은 고민을 하였다. 그가 15세 되던 1783년 니스키(Niesky)에 있는 모라비아 학교에 입학하여 그곳에서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즐기는 감정적 기쁨을 경험하였다.

그는 1785년 바르비(Barby) 신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철학적 토론에 몰두하다가 퇴교를 당했으며 할레(Halle) 대학에 가서 그리스철학과 칸트 연구에 전념하였다. 1790년 신학시험에 합격하여 개혁파 칼빈주의 교회(Reformed Calvinistic Church)의 설교자가 되었다. 그 당시의 관습에 의해 백작의 가정교사 일을 하면서 교양있는 부인들의 모임을 만들어 참여하기도 하였다. 그의 설교는 도덕주의 적인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것이었다. 1793년 교사자격을 획득한 후 베르린(Berlin)으로 이주하여 자선병원에서 6년 간 설교를 하였다.

1798년 "종교를 멸시하는 교양인을 위한 강연"이라는 책을 무명으로 저술하였다. 이 책은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신앙적 윤리의 문제들이었다. 쉴레겔(F. Schlegel)과 노발리스(Novalis)등과 함께 낭만주의(Romanticism)의 입장에 서서 그는 자연적 본능과 생명, 자유, 개인적인 취미, 자발적인 창조와 명상 등 인간성 본연의 모습을 신학적으로 서술하려 하였다. 생명의 신비로움을 가지고 자연과 인생을 보았으며 권위를 무시하고 개인적인 자유를 강조하는 운동에 그는 앞장을 섰다. 그의 평생 과제는 자신이 자란 경건주의 적인 종교적 감정과 자유스러운 사고와 비판주의를 어떻게 결부 시킬 것인가 이었다.

베르린을 떠나 슈톨페에서 2년간 운둔하며 궁중목사로 일을 하였다. 그곳에서 플라톤 번역을 시작하였으며 프러시아의 루터파와 칼빈파를 접근 시키시 위한 소책자들을 출간하였다. 1804년 할레대학의 교수로 초청을 받아 강의를 시작하였다. 구약학을 제외한 전과목을 강의하였다. 그의 강의들은 신학전반, 변증법, 철학사, 윤리학, 교육학, 국가학 등이었다. 이때 강연집과 플라톤 번역 그리고 디모데전서의 비판적 논문을 발표하였는데 디모데전서는 영어로 번역이 되었다. 그의 설교는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으며 비스마르크(Bismark)로 하여금 견신례에 참여하도록 하였다. 1807년 베르린으로 돌아와 헬라철학에 관한 강의를 시작하였으며 1810년 베르린 대학이 개교되면서 지도적인 교수의 일을 시작하였다. 그는 성 삼위일체교회(Holy Trinity Church)의 설교자가 되었다. 그는 이 강단을 통해 사람들에게 많은 감명을 주었다. 정열에 불타는 애국자이기도 하였다. 프랑스에게 점령당하고 있는 동안에는 프랑스 대장 다보스(Davoust)에게 불려가 경고를 받은 적도 있다.

오랜 세월동안 저술과 설교 하루에 3시간 강의를 계속하면서 종교와 과학주의를 융화시키려고 노력하였다. 종교와 지적 생활이 분리되는 것을 원치 않았으며 경건 이라는 말이 무지라는 말로 대치되는 것을 반대하였다.

그는 몇 분간의 묵상으로 강연준비를 끝낼 만큼 탁월한 자유주의적 성격 때문에 교수의 직을 박탈당할 뻔하기도 하였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종교론」(Über die Religion, Reden an die Gebildeten unter ihren Verächtern, 1799)과 1822년에 출간된 「신앙론」(Der Christliche Glaube nach den Grundsätzen der evangelischen Kirche im Zusammenhang dargestellt)이있다. 그는 칸트와 헤겔의 철학과 기독교 신앙을 조화하여 합리적인 것을 만들어 그 시대에 소개하려 하였다. 그의 사후 편집된 저술들은 약 30여권으로서 신학 13권, 설교집 10권 그리고 철학의 분야가 9권이 있다.

2) 바르트의 생애

카알 바르트(K. Barth, 1889-1968)는 스위스 베른의 신약신학자 프르츠 바르트의 아들로 태어났다. 베른, 베를린, 튀빙엔, 마부르크에서 수학하고 자펜빌(Safenwil)에서 1911-1921년까지 10년 간 농촌목회를 하였다. 삶과 성서의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졌으며 1919년 「로마서 강해」를 출판하여 세계적인 신학자가 되었다. 1921년에 괴팅엔대학의 교수로 초빙을 받아 교수 생활을 시작하였으며 1925년에는 뮌스터 대학에서 강의를 하였다. 1930년에는 본(Bonn)대학의 교수가 되었으며 히틀러가 집권하여 교회까지 장악하려 하자 고백교회에 참여하여 교회 투쟁 지도자의 한사람이 되었으며 독일 민족주의와 히틀러에 반대하는 신앙고백서인 「바르멘 선언」을 기초하였다. 독일에서 스위스로 돌아와 바젤대학에서 교수 생활을 하다가 82세의 나이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2. 신학의 방법론

신학의 방법론에는 두 가지가 있다. "위로부터의 신학"(Theologie von oven)과 "아래로부터의 신학"(Theologie von unten)이다. 전자는 선지자들로부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는 신앙가들의 신학적인 방법론으로 하나님의 말씀 속에 나타나는 계시와 하나님의 뜻이 중요하다. 후자는 시대주의 신학자들의 신학적인 방법론인데 이들은 신학이란 그 시대의 산물이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하나님의 뜻이나 성경의 내용보다는 그 시대의 정신(Zeitgeist)을 가지고 성경을 해석하려 하였다.

쉴라이어마허는 “아래로 부터의 신학”에 속하는 최초의 개신교 신학자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의 신학을 자유주의 신학, 시대정신의 신학, 인본주의 신학이라고 한다. 바르트가 쉴라이어마허를 깔뱅 이후 최대의 신학자요 가장 영향력 있는 사상가라고 평하면서도 그의 신학을 “의식의 신학”이라고 하여 이를 거부하며 극복하려고 노력하였다. 그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로서는 범신론자, 주관주의자, 19세기의 대 이단자라는 것이었다.

그가 사용한 우주의 개념을 보더라도 “세상 모든 것”(Weltall)으로 보는 것이 옳다. 인간성의 진수, 숭고한 세계 정신, 영원한 사랑, 응보, 운명, 신성 등 우주는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동일시 할 수 있는 경험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주는 자연과 인간 사건의 다양성과 대조되는 불변성과 전체성을 말하는 것이다. “모든 것이 변할 수 있는 곳 어디서나 불변하는 것을 찾고, 무한 한 것과 유일한 것 이외의 어느 곳에도 신뢰를 두지 않는 것 바로 그것이 종교이다.” 이것은 신화와 고대 세계관에서 보는 하나님 개념에 대한 거부이다.

미국에서 그를 긍정적으로 보고 재평가하려는 운동이 일어났는데 리차드 니이버(R. Niebuhr)와 윌리암즈(R. R. Williams), 게리쉬(B. A. Gerrish)등이다. 이들은 쉴라이어마허를 루터와 칼빈의 합법적인 상속자로 규정하고 이를 입증하려 하였다. 이런 면에서 우리는 자유주의 신학의 시조라고 불리우는 쉴라이어마허를 재평가하는 것이 필요하다.

바르트의 신학은 “위로부터의 신학”으로 시작된다. 그는 신학을 모든 인간학적 전제로부터 해방하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계시 위에 세우려 하였다. 그에 의하면 인간이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이 자신을 인간에게 알려주는 계시의 일이다. 계시는 하나님이 그의 말씀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심이다.

바르트의 신학적 첫 작업인 「로마서 1판」연구를 하던 당시 그가 즐겨 쓰던 신학적 명제들은 다음과 같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지 세계가 아니다. 세계와 인간과 역사와 문화와 종교와는 전혀 다르다. 세계는 세계이지 하나님이 아니다. 하나님은 심판을 통해 말씀 속에서 세계와 인간을 만난다.” 하나님의 긍정과 부정 속에서 심판과 은혜를 경험하는 인간의 무능력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바르트에게는 세 가지 형태를 갖는다. 기록된 성서의 말씀과 그리스도안에 계시된 말씀과 선포된 설교의 말씀이다. 세 가지 형태는 모두 하나님을 계시하는 면에서 하나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계시를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믿음을 통해 받는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초월을 강조하고 이성을 가지고 있는 인간의 모든 능력이 범죄 후 타락하여 악화 되어있기 때문에 자연신학은 불가능함을 말하였다. 신의 계시는 오직 그리스도에게 있고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과 유일한 교제의 수단이라고 한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서 신학의 구성을 위한 과학, 문화, 예술에 대한 실증적인 태도를 거부하였으며 신비주의와의 공감이나, 감정의 종교를 수반하는 종교 철학과의 오류 등으로부터 신학을 해방시켰다. 신학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과 성경의 가르침에 기초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에의 봉사(ministerium verbi Dei)라는 관점에서 보면 신학은 역사와 사회 즉 세계 속에서 하나님을 중언하기 때문에 역사적이고 역동성을 갖는다고 본다. 교회안의 말씀을 전제하면 “하나님으로 부터”(von Gott her)이며 세계 속의 교회로 보면 “하나님에로"(zu Gott hin)가 동시에 가능해 진다는 것이다.

바르트는 1932년부터 그의 생애의 말기까지 「교회 교의학」(Kirchliche Dogmatik)이라는 신학적 대작을 썼다. 이 책은 사도신조의 구조인 “하나님, 그리스도, 성령 그리고 교회”라는 네 가지의 주제를 가지고 쓴 개신교 신학의 역사에서 불후의 신학적 대작이다.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전하고 있는가를 판가름해주는 교회의 책이라고 할 수 있다. 바르트가 현대 개신교 신학에 미친 영향은 절대적이며 바르트를 이해하지 못하고서는 현대신학을 이해하지 못할 정도의 영향력을 갖고 있다.


3. 초기의 신학 형성

1) 쉴라이어마허

쉴라이어마허에게 영향을 준 사람들은 칸트와 플라톤, 스피노자, 라이프니쯔, 피히테, 쉘링등이다. 특히 칸트와 플라톤 철학이 그의 사상형성에 큰 도움을 주었다. 플라톤에게서 종교는 “무한자에 대한 의식”임을 알게 되었다. 그의 종교에 대한 논지는 “종교는 우주에 대한 직관과 감정이며 형이상학과 도덕에 병행하는 본질적이고 필연적인 제3의 인간정신”으로 보았다. 이 말을 통해 그는 종교의 본질은 사유나 행위가 아니라 직관과 감정임을 보여주고 싶었다. 살아 움직이는 모든 것의 생성과 변화 속에서 무한 한 존재를 발견하는 것 그리고 그런 존재로서 사는 것이 종교라는 것이다. 그는 모든 개별자와 유한자, 그리고 인간의 속에서도 무한자를 보며 각인된 흔적과 연출을 볼 수 있다고 함으로써 범신론자라는 평을 받는다. 이는 스피노자의 영향이다: “모든 실재는 실질에 있어서 하나이다. 원인에 있어서 하나이며 근원에 있어서 하나이다. 그리고 신과 이 실재는 하나이다. 그러므로 철학의 과제는 다양한 것에서 통일을, 물질 중에 정신을, 정신 중에 물질을 인정하는 것이며 신의 사랑의 지적 영상인 우주적 통일의 최고 인식에 도달하는 것이다.”

쉴라이어마허의 초기 사상과 후기 사상의 관계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강조점의 점진적 변화로 본다. “하나님은 세계의 활동에 의해 알려지며 세계는 하나님의 계시의 장소”라는 벤트란트(J. Wendland)의 입장과 “일자와 전체(the one and All), 전체 속의 일자(the one in the All)”로 이해하던 하나님 개념이 신앙론에서는 존재의 근원으로 바뀌는 변화를 그레비(J. K. Graby)가 제시하였다. 이렇게 볼 때 「종교론」(1799)에서 「신앙론」(1830-31)에 이르기까지 범신론적인 경향에서 본질적인 변화가 없었다고 본다. 종교론의 신개념을 범신론으로 신앙론의 신개념을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을 강조하는 유신론으로 보는 입장도 있다.

칸트에 매력을 느낀 것은 이성을 이성이 속한 영역으로 복귀 시켰기 때문이었다. 칸트를 연구하면서 그는 종교보다 윤리를 우위에 두었으며 기독교신앙을 칸트의 윤리학적 관점에서 평가하였다. 자신의 스승 에버하르트의 가르침에 의해 칸트와 다른 입장을 취하게 된 것은 종교의 자리는 감정이지 실천이성인 도덕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이렇게 말함으로써 칸트가 주장하던 이론이성과 실천이성의 분리를 극복 한 것이다. 종교는 아는 것(knowing)과 실천하는 것(doing)의 통일체라는 입장을 취하였다.

2) 바르트

바르트의 초기신학 작업을 살펴보면 바르트가 경건주의자들과 신학적인 논쟁을 하고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신학적인 논쟁은 많은 연구들을 통해서 입증이 되었으며 특별히 에바하트 부시의 작품인 「칼 바르트와 경건주의자들」이라는 책에서 더 구체적으로 보여지고 있다.

바르트의 초기 신학이 어떻게 형성되었는가에 대한 지금까지의 연구로는 불름하르트의 신앙적 영향이라고 말하고 있으나 신학연구의 동반자 투르나이젠과의 학문적인 서신교환과 신학의 전개 그리고 요한 토비아스 베크의 「로마서」 연구가 결정적임을 주의 하여 볼 필요가 있다.

베크를 우리가 경건주의 신학자이자 동시에 마지막 성서주의 신학자라고 한다면 그의 영향이 어떻게 바르트의 신학에 미치게 되는가 하는 것을 연구하는 것은 가치가 있다고 생각이 된다. 바르트와 베크를 연결시켜주는 한 점으로서는 바르트의 책 「19세기의 개신교 신학」이라는 책에서 보여진다. 그러나 여기에서 서술되는 베크는 그를 제대로 알기에는 충분하지 못하다. 그 이유로서는 바르크가 베크의 초기 작품들만을 소개했기 때문이다.

성서주의적인 영향에 힘입어서 바르트는 자신의 신학적인 작업에서 역사 비판적인 성서연구의 방법과 입장으로부터 나오는 것을 보게 된다. 이러한 신학적 입장은 지금까지 바르트의 신학 연구를 형성해 왔는데 이제는 그의 성서 해석학에 영향을 주는 영감론으로 방향을 바꾼다. “역사 비평적인 성서 연구의 방법은 옳은 점이 있다: 그것은 인간의 이해들을 준비하는데 있어서 너무나 과장된 영향력을 주지 않도록 해준다. 그러나 역사적인 성서연구 방법과 영감론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려 하라고 한다면 나는 영감론을 선택하고 싶다. 그 이유는 그것은 폭이 더 넓고 깊고 중요한 옳은 점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바르트의 성서연구방법에 있어서 루터적인 입장을 중시함을 보게된다.

바르트는 그의 아버지의 죽음을 하나의 감동적인 설교를 통해서 반응을 보였다. 그는 그의 아버지를 이 시점에서부터 객관적으로 재평가하게 되었으며 그가 신학공부 기간 동안에 많이 남겨두었던 신앙적인 것들을 가지고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역사이해는 계속되는 것이다. 그것은 어제의 지혜와 내일의 지혜간에 끊임없이 계속되는 대화이며 하나의 동일한 것이다. 존경심을 가지고 여기 내 아버지 프리츠 바르트에게 감사를 드리는 것은 전 일생 동안 그가 하나의 통찰력을 가지고 머물렀다는 그 점이다.”

그의 설교들은 하나님에 관한 물음들로 가득 차 있다. 동시에 기독교 공동체에 있어서 사회주의는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사건은 “항상 무조건적으로 우선을 갖게 되며 ‘먼저 하나님의 사건, 그리고 인간인 우리의 사건들’, 이때 인간은 하나님과 그의 전 생에 있어서 진지한 삶을 누릴 수가 있으며 사회적인 어려움을 해결할 수가 있다. 사회주의는 복음의 매우 중요한 그리고 필요한 한 적용이 된다.”

바르트는 신앙과, 계시, 그리고 하나님의 개념에 대해서 실질적으로 어떻게 이야기 할 것인가를 얻기 위하여 노력을 하였다. 그는 이러한 생각들을 설교시간에 피력을 했으며, 그는 자기 자신의 신앙적인 입장을 버렸을 때에만 올바른 신앙을 가질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제1차 세계대전을 찬성하던 93명의 독일 지식인들의 놀라운 선언이 있게되자 그는 자신을 전 신학과정을 통해서 만났던 신학자들, 예를 들면 A. 폰 하르낙, R. 세베르크, A. 쉴라터, W. 헤르만, M. 라데, R. 오이겐 등의 신학으로부터 떠나 방향을 달리하게 되었다.

칼 바르트가 “어디까지 기독교인이 사회주의자가 될 수 있을까?”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 동안에 그는 스스로 “얼마만큼이나 하나님나라의 사상을 그의 신학에 연결시킬 수가 있을 것인가?” 라고 물었다. “자유-신학적인, 그리고 종교-사회적인 문제들의 범위를 벗어나서 나는 성서적으로 실제-초월적인 의미를 갖는 용어인 하나님나라의 사상이 나에게 도전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런 생각들을 가지고 내가 지금까지 의도적으로 오랜 동안 설교해왔던 성서의 내용들이 문제가 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여러 가지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그는 신학적인 방향 전환을 먼저 시도했다. 그러나 이 일은 그 혼자서로는 너무나 벅찬 것이어서 그는 자신의 신학형성을 위한 대화의 상대자인 트루나이젠에게 조언을 청했다. 트루나이젠은 그에게 용기를 주었다. “설교나 강연 그리고 목회를 위하여 필요했던 것들은 전혀 다른 신학적인 기초석 이었을 것이다.” 이 말은 바르트로 하여금 쉴라이어마허, 칸트, 헤겔 등 독일 지성인들의 학문체계를 벗어나 관심을 성경에 돌리며 독자적인 신학의 길을 가게 하는 결정적인 조언이 되었다.


4. 신학적 주제와 사상의 발전

1) 쉴라이어마허

쉴라이어마허의 신학적 물음은 종교가 무엇인가? 그리고 기독교가 무엇인가? 이었다. 전자는 1799년에 발표된 그의 「강연집」과 1800년에 그의 윤리론인 「종교론」에서 후자는 1822년에 출간된 「신앙론」에서 취급하였다.

일반적으로 사실 그 자체(Sache selbst)를 해석할 때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사실을 개별적, 주관적인 관점에서 추상화하고 객관화함으로써 보편화시키는 것과 다른 하나는 사실 그 자체와 직접적이며 구체적으로 만나 실존적인 체험의 현장에서 자기화 시키는 것이다. 쉴라이어마허는 후자의 관점을 가지고 논리를 전개한다.

① 강연집

그의 대표적인 책 「강연집」은 다섯 개의 강연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첫째 강연은 계몽주의 적인 종교비판으로 부터 종교를 옹호한다. 종교는 교양인들의 체계적인 개념의 틀 안에 갖혀 질 수 없으며 이것을 체험하는 사람의 내면 가운데에서 생동적으로 작용한다. 종교는 체계적인 형이상학과 도덕과 근본적으로 구별되는 것임을 지적하였다.

둘째 강연은 종교의 본질이다. 종교의 고유한 영역은 인간의 심정이 무한자의 적극적인 활동에 전적으로 사로잡히게 됨으로 형성된다. 이러한 감동과 사로잡힘은 이성이나 의지라기보다는 직관과 감정의 일이다.

셋째 강연은 종교의 교화나 교육은 교의적인 가르침에 의해 이루어지지 않으며 오직 무한자에 대한 감각능력의 개방에 근거한다. 무한자에 대한 생동적인 체험과 관계가 없는 가르침은 죽은 문자에 불과하다.

넷째 강연은 종교의 외적인 사회적인 현상과 성직에 관한 것이다. 진정한 교회와 교의직인 교회, 국가와 교회의 구별, 성직자와 평신도의 관계가 경건 즉 무한자를 향한 심정 즉 진정한 감동에 의해서 된다는 것이다.

다섯째 강연은 개별종교의 분석과 진정한 종교의 이상을 제시한다. 종교의 내용을 개념적으로 추상화하고 체계화하는 자연종교 내지는 자연신학을 비판하며 역사적인 실증종교를 옹호한다. 종교의 생명력은 보편적인 개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개별적이고 특수한 형태를 갖기 때문이다.

② 종교론

그는 종교를 우주의 직관(Anschauung)과 감정(Gefühl)으로 규정을 했다. 종교는 우주의 직관인 동시에 직관과 결합하고 있는 감정이라는 말이다. 이것은 종교의 본질이 지식(knowledge)이나 행위(action)가 아니라는 말과도 같다. 감정과 직관은 본래 하나라는 것이다. 우주라는 것은 살아있는 존재전체를 의미한다. 즉 세계와 자연, 인류, 역사 등을 의미하며 직관이란 이 우주에 대한 직접적 지각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종교적 직관이며 이 직관이 종교적 감정의 표현에 의해 다른 사람에게 전달되는 것이다. 이때의 직관은 하나의 계시를 의미한다.

그는 마 6:8 “구하기 전에 있어야 할것을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신다”를 인용하여 예수가 위대한 종교적 영웅이라고 하였다. 자연을 직관함으로써 최고의 것, 유일한 것을 얻었다는 것이다. 이와같이 직관은 개별적인 것이며 직접적인 지각을 말한다. 이러한 직접적인 지각을 통해 인간은 최고 존재자의 개념을 승인하게 된다.

신개념은 사람들이 생각하고있는 것 처럼 그렇게 높은 것이 아니라 우주정신을 인격화 하는 것이며 상상력을 통해 믿되 인간의 구원이나 신을 이용하기 위해 믿는 것이 아니라 믿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믿는 것이다.

인간이 직관에 의해 신을 믿는가 믿지 않는가는 인간의 상상력에 달려있다고 전제 할때 신 없이도 종교는 존재하며 Fichte와 같이 무신론 논쟁을 야기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③ 신앙론

절대의존의 감정이란 절대자에게 의존하고 있는 직접적 자기의식을 의미한다.

그는 종교적 발전과정을 3단계로 나눈다. 첫째는 주관적 의식과 객관적 의식을 나누지않는 동물적 혼돈의 상태로서 우상숭배에 속한다. 둘째는 두가지의 의식을 나누면서 자신을 세계와의 대립에서 의식하는 단계로 다신교에 속한다. 이 대립이 지양되어 최고의 자기의식으로서 절대적 의존의 감정이되는 유일신교를 말한다. 그리스, 로마종교는 다신교 그리고 기독교, 회교, 유대교는 유일신교에 속한다. 인간의 수동성과 능동성 내지는 자기활동성에 의해 전자는 심미적 종교로 최고조에 달하는 상태이며, 후자는 목적론적 종교를 의미한다. 기독교와 유대교에서 보여지는 신앙형태들이다.

그의 계시관은 계시의 초자연적 내지는 초월적 성격을 절대적인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 다. 신의 영과 인간의 이성 사이에 절대적인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 그 자체가 인간 이성의 최고의 상승이라고 한다. 이것은 주관적 신개념을 의미한다.

그리스도는 신적 계시이면서도 초자연적 존재가 아님을 말한다. 이렇게 말함으로써 그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부정하며 계시의 합리성을 말하게도 했다.

구원은 악한 상태에서 보다 나은상태로 옮겨가는 것인데 악한 상태라함은 높은 자기의식이 저지당하여 경건한 상태가 전개되지 못하거나 거의 소멸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을 자극하여 이 악한 상태에서 해방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기독교의 절대성과 유일성을 부정하는 것이다(행 4:12).

교회는 우주의 직관과 감정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하려고 하는 필연에서 성립된다. 다른 사람들도 이것을 받아들이기 위해 모여든다. 인간의 내면에 있는 같은 종류의 의식(Gattungsbewusstsein, the consciousness of kind which dwells in every man)이 이를 가능케 하며 이러한 공통의 경건의 자기의식이 하나의 공동체가 되도록 한다.

이것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독백론」(Monologues)과 「변증론」(Dialectic)을 보아야 한다.

그는 「독백론」에서 칸트의 지상명령이라는 개념을 반대하면서 도덕은 그 질에 있어서 법적이 아니며 자연법적이고 유기체적임을 말한다. 자유인은 도덕법에 복종하라는 명령아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 안의 영혼의 권위보다 더 높은 아무런 권위에 구속받거나 통제를 받지 않고 사는데 있다고 한다. 마치 나무와 같이 자유스럽게 자라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 것과 같다. 나무가 자라는 자유스러운 모습 속에서 신앙 안에서의 참된 자유를 보았다.

사람이 자기충족의 자연스러운 성장으로 자신의 본성을 표현한다고 볼 때 그의 가는 길을 아무도 막을 수없을 것이다. 그것들이 세상이거나, 운명이거나, 하나님이거나 간에 인간의 개별적인 성격을 충분히 다채롭게 표현해야 할 것이다. 이때 자유인은 모든 것의 주가 된다. 이는 루터의 그리스도안에서 자유는 "그리스도인은 모든 것에 대해 완전히 자유스러운 주인이요, 어떤 것에도 종속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것에 대해 완전히 의무를 지닌 종이요, 모든 것에 종속된다.“로 표현되었는데 이것과 다른 차원의 자유이다.

자유라는 것은 하나의 자연현상으로서 자연적 원인과 결과로 이해하여 인간의지에서 출발하였다. "너 자신의 인격 안에서 인간성을 특수하게 구체화하라"는 것이 독백론의 요점이다. 인간은 인간의 개성을 충분하게 발달시켜야 한다. 혼자가 아니라 사회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는 이책에서 인간의 도덕적 실패나 죄에 관한 것은 언급하지 않는다. 그가 목적하는 바는 성취한 것이 아니라 소망에 관한 것이며 미래에 대한 것은 이상적인 형태를 가지는 것이다. 낙관주의적인 사고 속에서 본 인간 이해에 대한 결과이다.

「변증론」에서 보여지는 그의 사고의 이론은 인식론과 형이상학의 구조를 갖는다. 생각한다는 것은 지식에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 것을 의미한다. 지식은 두 종류의 대상이 전제된다. 생각과 실재 그리고 생각과 다른 생각 사이의 응답이다. 전자는 상호관계가 성립된다는 전제 하에서만 설명된다. 이념의 세계와 실제의 세계라는 두 개의 서로 반대되는 세계의 밑바닥에 어떤 근본적인 통일성이 있을 것이라는 것이 전제된다. 이렇게 함으로써 두 세계사이에 서로 일치 할 수 있는 조건을 제공한다. 이것이 지식이다. 우리가 무엇을 인식한다는 것은 이러한 공통된 기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생각이란 가능성에 대한 정신적인 도전이 될 때 실재적이 되는 것이다.

지식의 타당성을 확인한다는 것은 궁극적인 의미에서 모험이며 믿음이며 신념이기 때문에 불가능하다. 지식의 타당성 그 자체는 증거 할 수 없는 진리이다. 그러나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이것을 부정한다면 이성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부정할 수 없다. 이 긍극적이며, 기본적 그리고 보편적인 관계성을 가진 기반을 우리는 한편으로는 하나님, 다른 한편으로는 세계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의 전 사상은 기독교 적 이라기 보다는 헤겔의 변증법과 논리주의 그리고 칸트의 윤리에 기초한 합리설이 근본 정신이다. 이것을 가지고 여러 가지로 성경을 해석하였다.

문예부흥 이래로 근대를 특징 지어주던 신(神) 대신에 인간(人間)을 높이 평가하는 낭만주의가 그의 사고를 지배하였다. 헤겔은 인간의 이성을 칸트는 인간의 도덕의지를 예찬했다고 한다면 쉴라이에어마허는 인간의 감정이 종교의 기초가 된다고 하였다. 인간의 감정을 인간존재의 기초로 두고 시문학, 음악, 미학, 정치, 윤리, 종교 등을 해석하고 발전 시키려한 사람들이 낭만주의자들이다. 이에는 루소, 하이네, 횔더린, 바이론, 칼 라일, 유고, 괴테, 쉴레겔, 쉴라이어마허 등이다.

쉴라이어마허의 신학은 경험신학과 평가의 신학이라고 불리어지는 자유주의 신학을 가능케 하였다.

2) 바르트

바르트의 신학사상은 다섯 단계를 거쳐 발전하였다.

1) 초기 바르트의 신학 형성은 쉴라이어마허의 사고형에 빠져 19세기에 발전한 종교적 개인주의와 자유신학이었다. 그가 신학연구를 할 때 많은 영향을 주었던 종교사학파의 교수들인 파울 베르네(1875-1936), 헤르만 쿠터(1863-1931)나 레온하르트 라가즈(1868-1945) 등을 통해 자유스러운 이성적 신학을 연구하였다. 올바른 기독교를 그는 올바른 사회주의에서 찾으려 하였다.

2) 바르트가 튀빙엔에서 공부할 때 인 1915년 바드 볼(Bad Boll)에 있는 불름하르트를 방문하게 되었다. 그와의 만남과 대화를 통한 새로운 하나님 이해이다. 점진적으로 세계를 새롭게 하시며 변혁시키시는 하나님 안에서 그는 기독교와 희망이라는 새로운 주제를 발견하게 되었다.

3) 새로운 신학에로의 출발이다. 1차 세계대전을 찬성하던 93명의 독일 지식인들의 선언이 있던 날 자신의 전 신학 과정에서 만났던 신학자들 예를 들면 하르낙, 제베르크, 쉴라터, 헤르만, 라데 등으로부터 떠나 다른 신학의 방향을 가게되는 것이었다. 이때 중요한 신학의 대화 상대자는 에드워드 투르나이젠이다. 이것은 로마서 주해 1판을 낼 때까지 계속된다.

4) 「로마서 주해」 제 2판을 만든 후부터 바르트는 인간과 신을 혼동하고 인간을 하나님의 자리에 놓은 개신교 신학의 주관주의를 비판하면서 하나님은 사람과 비교하여 볼 때 전혀 다른 분이심을 공식적으로 표현한다. “하나님은 절대 타자(Gott ist ganz anders)"라는 말이 이를 대변한다.

이러한 신학적인 사고는 그로 하여금 변증법적 신학의 주제를 갖게 한다.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된 인간, 창조주와 피조물, 영원과 시간, 하나님의 긍정과 부정 등이다. 영원자 되신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역사에 참여하시고 동시에 그곳에 존재한다고 볼 때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는 위기라고 보았다. 이러한 사고는 자신에 대한 철저한 비판과 성경연구의 결과에서 온 것이다. 그가 얻은 결론은 사람이 하나님께 대해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고 행하셨는가를 그는 신학적인 주제로 물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다(Deus dixit)"는 그의 명제는 바르트의 신학이 ”말씀의 신학(ths Theology of the Word)"임을 보여준다.

5) 「교회 교의학」(Church Dogmatics) 제1권을 쓸 때인 1932년부터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장 구체적인 용어로 표현하기 시작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위기나 변증법적인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품성, 말씀이 육신이 되심 등 참 하나님과 참인간에 대해 신학적인 작업을 하게 되었다.


5. 절대의존의 감정과 그리스도 중심

1) 절대의존의 감정

쉴라이어마허의 「종교론」은 종교를 멸시하며 종교와 유리 되어있는 교양인을 상대로 한 것이다. 그는 교양인들과 종교에 대한 논쟁을 하려 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어떤 소질에서 종교가 발생하는 가를 보여 주려 하였다. 칸트와 같이 도덕으로 종교를 환원하거나 헤겔과 같이 형이상학에 종속시키는 것을 부정하고 종교는 직관과 감정임을 보여주기 위해 계몽주의 종교관을 비판하기 시작하였다. 그가 얻은 결론은 “종교는 도덕이나 형이상학, 교의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가 즐겨 쓰는 종교는 인식이나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지식과 의지의 중간인 인간정신의 본연적이며 필연적인 제3의 영역인 심정의 문제이다. 지식과 의지는 절대자를 가정하거나 요구할 수는 있어도 신을 파악할 수는 없다. 감정 속에서만 절대자의 현존이 계시되는 것이며 거기에서만 우리는 신을 직접 파악 할 수 있다. 모든 마음의 중심을 이루는 이 경건의 감정이 종교라고 보았다.

종교는 이런 면에서 지적인 작용이나 과정의 결과도 아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하나의 학설에 불과할 것이다. 종교는 행위로 성립되는 것도 아니다. 도덕이 아니기 때문이다. 종교에서 행위를 요청하는 것은 종교가 도덕을 포함하고 행위를 있게 하는 동기가 종교 안에 있기 때문이다. 도덕적 행위는 종교의 일부가 되는 것이지 전부는 아니다. 헤겔은 종교를 지적 작용으로 보았다. 칸트는 종교를 도덕적 행위에 기초하여 성립된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잘못이다.

종교는 또한 지식, 감정, 행동(知, 情, 意)의 합성물도 아니다. 신을 절대로 의존하는 "절대 의존의 감정"(Schlechthinnige Abhängigkeitsgefühl)에서 시작된다. 여기에서 인간은 회개와 희열을 맛보고 모든 지식이나 도덕적 행위도 출발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종교는 이런 의미에서 객관적인 사상의 체계가 아니다. 인간이 느끼고 사무치는 감정에 뛰노는 생명이 있는 주관적 경험의 내용이다. 생명력있는 신앙의 회복이라는 경건주의 운동이 자유주의신학에서 자리메김을 하게된다.

지적작용은 사색을 통해 철학을 있게 하고 선한 행위는 윤리의 기초가 될 것이나 종교의 기본적 요건은 감정이다. 이런 면에서 신학은 철학도 아니요 윤리학도 아니며 종교적 감정을 경험하고 기술한 그의 소산물이다. 종교적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있는데 육체적 증거와 언어 그리고 시와 설교이다. 그중 시와 설교는 매우 중요하다. 교리는 인간을 진리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시와 같이

종교적 감정을 일으키는 자극에 불과 하며 이적 역시 종교적 감정과는 관계가 없으므로 그리 중요하지는 않다.

쉴라이에어마허의 신관은 스피노자와 같이 "세계에서 떠난 신은 공허하다"고 말하는 것을 볼 때 내재신론적(內在神論的)이다. 신은 세계가 보여주는 복합적 상관의 통일이라는 점에서 범신론적이기도 하다. 그에게 있어서 신은 세계와 질적으로 동일하다. 신은 절대 불 분리의 전체로서의 통일이며 세계는 분리된 부분이다. 신은 세계, 세계는 자연 그러므로 신은 자연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산출하는 자연(能産的自然, natura naturans) 즉 신으로서의 자연은 세계로서 자연을 있게 하는 자연이다. 피조된 자연(所産的自然, natura naturata) 즉 세계로서의 자연은 신으로서의 자연이 있기 때문에 있는 것이다. 전자는 자연을 있게하는 자연으로서의 능동적인 자연을 말하며 후자는 있게 피조된 자연으로서 수동적인 자연을 말한다.

세상에 만물이 있는 것은 전 우주를 통합하는 전체로서의 큰 자연에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만물의 자연이 작은 자연으로서 자연적으로 발생하여 존재한다는 것이다. 만물은 자연이라는 원인에서 자연한 방법으로 자연이 있게된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만물은 서로 상관되는 힘의 통일로 유지되며 존재한다. 그러므로 전 우주에서 자연만이 전능하며 이 자연의 창조와 섭리로 세계가 있게 되는데 이것이 신의 창조요, 힘이라고 본다. 그에게 있어서 신의 전능은 자연적인 힘이다. 이 자연의 힘이 전 시간을 꿰뚫을 때에 무한이 되고 전 공간에 미칠 때에 편재가 되며 전 도덕에 미칠때에 성(聖)이 되며 지식에 나타날 때 전지가 된다. 이 모든 것들은 자연의 힘이 미치는 곳에서 나타나며 자연과의 관계에서만 이해할 수 있다.

그의 신관은 인격적인 존재로서의 신이 아니다. 기독교적인 신은 자연이 있기 이전에 계셔서 세계와 자연을 창조하셨고 지금은 섭리하시고 계시는 신이시다. 하나님은 세계 밖에서 이 세상을 창조하셨고 그가 창조하신 세계 안에 계시면서 섭리하고 계신다. 기독교의 신은 초월적이면서 내재적이다. 쉴라이에어마허의 신관은 초월적인 신을 부정한 내재 신이요 자연이 신이라고 한 것은 비인격적인 범신론이다. 인간의 오관으로 경험되면서 영감을 불러일으키고 거룩으로 인도하는 모든 것을 계시라고 본다. 그는 초월적인 인격신에 대한 믿음을 제거하여 버렸다. 하나님과 개인적인 만남인 "나와 당신"(I-Thou)의 관계가 없다. 그는 구주로서의 예수를 사랑했으나 대표적인 인

간으로서의 예수였지 성육신 된 하나님으로서의 구주는 아니었다. 구원의 교리에서 가현설이 보여지며 죄는 하나님께 대한 반역 이라기 보다는 육과 영사이의 갈등으로 보았다. 이것은 사실상 신이 아니라 자연이다.

그의 신관은 스피노자(Benedictus de Spinoza, 1632-1677)의 신관에다 기독교의 신관을 붙여 본것에 불과하다. 스피노자는 "신은 신체-물질의 세계-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영혼은 단지 생명이며 구약성경에서는 영생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그의 신관은 범신론적이다. "자연은 신이다"라고 한다.

2) 바르트

바르트 신학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교리이다. 한 인성 안에서 ‘참 하나님 참 인간’(vere Deus vere homo)이신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신앙적 신비를 직면하게 된다. 그 가 즐겨 쓰는 말은 “예수는 승리자”(Jesus ist Sieger)이다.

그의 신학을 순종의 신학이라고 평하는 사람들이 있다.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무익한 종이기에 하나님에 대해 말할 때 성부, 성자, 성령을 올바로 나타낼 수 있는 길은 오직 인간이 그리스도에게 순종할 때만 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리스도의 인성과 사역을 신학의 주제로 가져온 바르트의 신학작업은 구미신학계에 100 여 년간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진리의 말씀을 연구하도록 공헌하였다.



6. 창조론

창조는 신앙인가 아니면 신화의 영향을 받은 다른 것인가? 이 물음은 오늘도 남아있는 문제이다.

1) 쉴라이어마허

쉴라이어마허는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기사의 사실여부를 중요시하지 않는다. 다음의 사실을 아는 것으로 족하다고 한다. 1) 세계는 하나님에 의해 기원되었다. 2) 세계의 기원은 하나님의 활동에 의한 것이다 3) 신의 활동력은 일시적으로 제한되지 않으며 변화의 조건이 된다는 것 등이다. 신약성경을 보면 다음 구절들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했다는 창조기사의 자료가 되지 못한다(행 17:24, 롬 1:19-20). 종교개혁자들은 창조기사를 사실 기록으로 보기는 하였으나 루터는 비유적인 설명을 반대하였고 칼빈은 이론적으로 이것을 말하기를 회피하였다.

창조의 기사가 창 1장과 2장에 있는 것은 그것이 사실이 아님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것이 사실이더라도 우리의 절대의존의 감정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 그런고로 우리의 교리가 될 수도 없다. 교리는 성경에 있음으로 교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감정으로 경험 할 수 있을 때에 생명있는 교리가 되는 것이다. 그의 견해는 결국 세계는 신의 창조가 아니라 자연의 발생 과정에서 생겨진 것이라는 것이다. 자연을 있게 하는 "능동적인 자연으로서의 자연"(natura naturans)을 말한다. 이는 실체 및 자연을 신과 동일시하는 스콜라철학에서 온 이론으로 스피노자에게서 나타난다.

2) 바르트

창 1장-11장까지는 상징적 혹은 신화적이며 창 12-50까지는 역사적이라고 하는 해석도 있다. 이에 대한 대표적인 학자로 칼 바르트와 게하르트 폰 라드이다. 이들은 창조를 역사적인 이야기로 본다.

바르트는 창 1-2를 신화적으로 연관을 지어 해석하였다. 바벨론의 창조신화인 에누마 엘리시(Enuma Elisch)라는 서사시는 신년축제와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았다. 신의 어머니 티야마트를 무찌른 마르두크신은 티야마트를 양분하여 하늘과 땅으로 만들고 신들 중의 하나를 제물로 바쳐 그 피로서 인간을 창조하였다고 한다. 마르두크의 역할을 그 당시의 왕이 극적으로 대행했다고 한다. 그러나 창조설화는 신화가 아니라 현실적인 창조의 역사이다.

바르트는 사제문서(P문서)에 사용된 창조하다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동사 “바라”(א󰙜󰔯)는 신적인 창조에만 사용하는 것으로서 무에서의 창조라는 사상을 내포하고 있다고 말한다. 헬라어 크티제인(κτίζειν)과 같은 뜻이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이미 있는 재료를 사용하여 새로운 무엇을 만드는 제2차 적인 창조를 하실 때도 이 말을 사용하였다(창 1:21, 27, 5:1, 사 45:7, 12, 54:16, 암 4:13, 고전 11:9, 계 10:6).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세계와 인간과 전적으로 다른 분이심을 주장한다. 우리가 세계를 하나님의 창조라고 말 할 수 있는 것은 세계자체를 보면서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계시행동에 대한 신앙에 의해서이다.

창조 이해의 출발점은 그의 백성을 출애굽 시킨 하나님의 해방하는 능력에 있다. 하나님의 역사적인 구원과 능력을 경험하면서 이스라엘은 창조적인 능력으로서의 하나님을 확인하였다.

성경에서 “만들다”를 의미하는 단어들은 아사(ה󰙴󰘝, machen, herstellen, arbeiten, erzielen)와 포이에인(ποίειν) 그리고 야차르(ר󰙅󰖷, bilden, formen, gestallten), 프랏소(πλάσσω)등이다. 이 단어들은 이미 있는 재료들을 사용하여 만드는 제 이차적 창조와 섭리를 의미한다.

그러면 바르트에게서 창조가 갖는 신앙적인 의미는 무엇인가?

1) 창조는 하나님의 자유로운 행위(a free act of God)와 선한 의지의 결단이다.

하나님은 이 세계에 대해 자유스러운 존재이시다. 자신의 내적인 자유를 통해 세계를 창조하셨다. 이 자유는 피조물에 대한 사랑과 구원으로 나타나셨다.

2) 창조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행위이다(창 1:1; 사 40:12; 44:24; 45:12). 만물은 성부로부터 성자로 말미암아 성령에 의해 창조되었다(out of the father, through the son, by the Holy Spirit). 존재(being)는 성부로부터, 상상이나 이념(thought or idea)은 성자로부터, 생명(life)은 성령으로부터 온다.

3) 창조는 하나님의 시간적인 행동(temporal act of God)이다. 창 1:1의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In the beginning God created the heavens and the earth)라는 말은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는 사물의 시작을 말한다. 창조 전에는 시간도 물질도 없었다. 하나님은 시간을 초월하여 계시는 분이시나 창조는 하나님의 시간적 사역이다. 어거스틴은 세계가 “시간과 함께”(cum tempore) 창조되었다고 한다. 창 1:1은 세계가 시작을 갖게 되었음을 말한다(참조. 마 19:4, 8, 막 10:6, 요 1:1-2, 히 1:10, 시 90:2, 102:25).

4) 창조는 무로부터의 창조이다. 무로부터의 창조는 기독교의 독특한 교리로서 하나님의 초월성과 능력을 말해준다. 이것에 대한 확실한 표현은 외경 마카비 2서 7:28에 언급되어 있다. 세계는 하나님 자신이나 하나님의 일부가 아니다. 범신론자들처럼 우주는 절대적인 필연도 아니다(엡 1:11, 계 4:11).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보여지는 그분의 절대 주권을 믿는 신앙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교리이다(시 33:6, 9, 148:5, 히 11:3, 롬 4:17, 행 17:28, 느 9:6, 골 1:16, 롬 11:36, 고전 8:6, 시 90:2).

무에서의 창조는 세계가 하나님께 의존적임을 나타낸다. 피조물과 하나님과의 긴밀한 연관을 보여준다. 이는 피조물에서 보여지는 하나님의 내재성을 의미하는 말이다. 하나님은 세계의 각 부분에 임재 하시고 영으로 역사 하시는 내재적인 신이시다. 이것을 기독교적인 용어로는 충만이라 한다(시 139:7-10, 엡 2:2, 렘 23:24)

5) 창조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다. 카톨릭에서는 “인간의 행복을 위해서”라고 하였다. 고대 희랍과 로마의 철학자들, 종교개혁시대의 인문주의자들 그리고 18세기의 합리주의 자들이다. 창조는 구원과 연관되어 이해 할 수 있다. 태초의 창조는 역사의 지평을 열어주며 종말에 새로운 창조로 완성되어야 할 것이다. “보시기에 좋았다”는 것은 형성된 것(factum)이라기 보다는 되어야 할 것(fieri)으로 이해된다. 창조는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구원의 완성을 지양하는 시간의 과정이다. 창조의 최종목적은 하나님의 고유한 초월성의 현현(顯現)속에 있다. 하나님의 현현속에 피조물의 안녕과 평화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함이다(사 43:7, 60:21, 겔 36:21-22, 눅 2:14, 엡 1:5-6, 계 4:11, 골 1:16, 고전 15:28, 롬 9:17).


쉴라이어마허와 바르트는 개신교 신학에 있어서 자유주의와 신정통주의의 거장으로 알려져 있다. 두 사람 모두 경건한 목회자의 가정에서 태어나 신앙적 교육을 가정에서 자연스럽게 몸에 익혔으며 계몽주의적 입장에 서서 그리스 철학과 칸트, 헤겔의 철학에 뿌리를 두고 신학적인 작업에 전념하였다.

쉴라이어마허는 바르비와 할레 대학에서 철학에 근거를 둔 신학을 연구하였다. 대학을 졸업후 자선병원과 궁중에서 그리고 베르린 성삼위일체 교회의 목사로서 설교를 하였으며 할레와 베르린대학의 교수로서 철학과 신학 그 이외에 설교집 등 30여권의 많은 저술을 남겼다. 특히 1822년에 출간된 그의 신앙론은 철학과 기독교를 조화하여 합리적으로 소개하려던 사변적인 작품이다.

바르트는 원래 스위스와 독일에서 자유주의 신학적인 교육을 받았으나 독일 지식인들과 결별을 선언 한 후에는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종교개혁적인 신학을 하기를 원했다. 바르트는 베른, 베를린의 하르낙, 튜빙엔의 슐라터, 마부르크의 헤르만에게서 공부한후 스위스의 자펜빌에서 10년간(1911-1921) 목회하였다. 1921년부터 1935년까지 괴팅엔과 뮌스터 대학에서 강의를 하였으며 나치스에 의해 해직 당한 후 1968년까지 바젤대학의 교수로 활동하였다.

이러한 신앙적인 배경을 갖는 이들에게서 보여지는 신학적인 입장은 처음에는 같았으나 다르게 나타나는 것을 보게된다. 우리가 앞에서 전제한 것처럼 신학의 주제는 처음에는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God-talk)”이었으나 교회의 회의를 통해 제기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 관한 논쟁으로 발전되었음을 보게된다.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해 신학은 교의학의 전분야가 되었으며 13세기 이후부터 신학은 더 이상 “학문의 여왕(regina sicentiae)”이 아니라 철학, 법학, 의학 등 학문의 한 분야가 되게된다. 그 이후 루터와 정통주의 신학자들에 의해 제기된 신학은 “하나님의 영과 그리스도”라는 두 개의 축을 가지고 성경이 해석되고 오늘의 정통주의 신학이 되었다고 본다. 신학을 신-인-세계학이라고 할 때 정통주의에서는 분명 신에 대한 물음을 통해 인간과 세계의 문제를 신학적으로 답하려는 의지가 보인다. 대표적인 사람이 위로부터의 신학을 시도한 바르트이다.

쉴라이어마허는 신의 물음보다는 먼저 인간의 문제를 중시한다. 플라톤이 말한 “종교란 무한자에 대한 인간의 의식”이라고 규정하면서도 자신이 영향을 받으며 자라왔던 모라비안의 경건성을 신학의 한 방법론으로 제시한다. “종교의 본질은 사유나 행위가 아니라 직관과 감정”이라는 것이다. 그가 즐겨 쓰는 신학적인 용어는 “절대의존의 감정"(schlechthinnige Abhänigkeitsgefühl)이다.

쉴라이어마허와 바르트가 근본적으로 다른 신학적인 명제를 내게 된 것은 하나님에 대한 전혀 다른 이해에서 출발한다. 전자는 그리스 철학의 좌파적인 전통을 이어받는 스피노자의 영향을 그대로 답습하여 실존의 체험을 자기와 동일시하는 범신론적인 사고를 가졌으며 이것을 헤겔의 변증법과 논리주의, 칸트의 윤리에까지 연결시켜 만들어 낸 합리주의적 신학작업을 하였다. 후자는 신학적인 작업을 처음에는 쉴라이어마허와 별 다를 바가 없이 시작하였으나 세계 제1차, 2차대전이 주는 실존의 문제와 인간의 죄성과 악함을 경험하면서 인간과 전혀 다른 하나님의 모습을 신학적인 주제로 삼아 변증법적인 과정을 통해 논리전개를 시킨다.

그는 칼빈의 후예이며 철학적으로 키에르케고르와 하이덱거의 실존주의 철학의 추종자이다.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질적 차이를 강조하고 하나님에 관한 진리를 변증법적으로 표현한 것은 키에르케고르의 영향이다. 그의 신학은 신정통주의 신학, 하나님의 말씀의 신학, 변증법적 신학, 위기 의 신학, 스위스학파라고 불리 운다. 그의 신학은 철저히 그리스도 중심이다.

바르트의 30년에 걸쳐 쓴 노작 『교회 교의학』(Church Dogmatics, 1932-67)은 예수 그리스도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에 신학의 토대를 둔다. 중심과 초점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다. 예수는 “진짜 하나님이시며 진짜 사람”(vere Deus vere homo)이다.

바르트는 로마서 주해를 출판 이후 변증법적 신학 운동을 전개하였다. 불트만, 고가르텐, 틸리히 등이 참여하였다. 학술잡지 『시간들 사이에서』(Zwischen den Zeiten)를 창간하여 신학 전개를 하였다. 시대의 사이라고 번역이 되기도 한다. 변증법적 신학은 19세기의 자유주의 신학 비판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쉴라이어마허의 신관은 내재신론적이다. 그의 신은 세계와 질적으로 동일하다. 인격적인 존재로서의 신이 아니라 "능산적 자연"(natura naturans)으로서의 신이다. 초월적인 신을 부정하는 범신론을 말한다. 그러므로 그에게 있어서 계시는 인간의 오관으로 경험하면서 거룩으로 인도하는 모든 것을 말한다. 죄는 하나님께 대한 반역이라고 보기보다는 영과 육의 갈등이다. 인간안에 주어진 내적인 능산적인 자연과 외적인 만들어진 자연의 부조화라고 할 수 있다. 종교는 이런면에서 절대의존의 감정에서 시작된다.

하나님을 인간으로 대치하고 신학을 인간학으로 변형시킨 자유주의 신학은 하나님의 실재성과 계시의 필요성 그리고 성경의 권위, 인간의 유한성과 죄성, 신앙의 본질을 진지하게 취급하지 아니하였다. 하나님 말씀에 대한 근본적인 오해이다. 이것을 바르트는 뒤집어 놓았다.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밑으로부터의 신학이 아니라 위로부터 내려오는 위로부터의 신학을 주장하였다. 바르트의 하나님만이 "하나님 그분"(Gott, der ist)이시다. 이 말은 인간과의 차원에 있어서 "하나님은 전혀 다른 분"(Gott ist ganz Andere)이라는 말이다. 하나님의 말씀 이외에 다른 것을 근거로 하여 신학을 정립하는 것은 바르트 에게는 불가능하다.

창조에 대해서 쉴라이어마허는 하나님의 세상 창조를 중요시하지 않는다. 단지 세계가 하나님의 기원을 갖는 하나님의 활동이라는 것과 지속적인 변화를 인정한다. 성경해석에 있어서 창조의 기사인 창세기 1장과 2장의 창조 사실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감정으로서의 경험을 강조한 나머지 세계의 창조는 자연 발생적임을 말한다.

바르트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볼 때 창조의 사건이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행동에 대한 신앙에 의해서 고백된 것이라고 말한다. 창조는 하나님의 자유스러운 행위이며 시간적인 행위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들어내는 것이다.

이러한 것을 종합하여 볼 때 쉴라이어마허는 만물에서 보여진 신성을 보면서(롬 1:20) 아래로부터의 신학을 제기하였으며 바르트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행위로서(창 1:1, 사 40:12) 무로부터의 행위이다.

신학은 하나님에 관한 학문이다. 이 하나님은 인간과 세계와의 관계에 있다. 성경은 인간과 세계와 관계없는 하나님에 대해서 관심이 없다. 세계의 역사와 문화, 종교, 정치적 상황은 모두 다르다. 인간과 세계의 다양성과 문화에서 보여지는 이 세대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연구하기 위해 폭 넒은 신학의 연구가 필요하다.

특히 신에 대한 이해를 존재론적으로가 아니라 과정과 변화로 이해하려는 상대성적인 시도에 대해 쉴라이어마허의 자연과학적인 “능산과 소산(Naturans et Naturata)”의 신 이해는 과학속에서 종교를 찾으려는 오늘을 사는 우리 모두에게 신학적 사고와 이해의 폭을 넒혀 줄 것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정통주의와의 완전한 결별을 선언한 자유주의 적인 것이다.

동시에 바르트의 신학은 말씀과 계시의 신학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를 신학의 기본으로 삼는다는 것이 정통주의 신학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신학은 시대적인 신앙의 체계를 논리적으로 서술한 것인데 성경을 문자적으로 보기보다는 의미를 추구하는 면에서 바르트는 신정통주의라는 신학을 가능케 하였다.

신학에서 자유주의와 신정통주의와의 만남은 성경해석의 방법에서 “성경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에서 가능하다. 동시에 근본적인 차이점은 헤겔의 변증법과 칸트의 윤리에 기초한 합리성을 받아들여 성경을 해석한 것과 전적인 타자이신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이라고 보는 입장이다. 인간에게 주어진 절대의존의 감정을 신적으로 보는 것과 그리스도를 통한 계시의 사건에 의해 기독교를 이해하는 것은 정 반대적인 입장을 갖는 것이다.

신학을 신에관한 이야기로부터 시작한다고 전제하면 바르트의 입장에 서야 함은 당연하나 신학이 인간과 세계를 우리가 믿는 기독교적인 신앙을 가지고 체계화시키려면 쉴라이어마허의 아래로 부터의 신학적인 입장을 가지고 해결해야 될 문제들이 시간이 지날수록 산적해 있다는 것이다. 이를 미루어 볼 때 바르트의 신학은 쉴라이어마허에게서 보여지지 않는 계시의 부분을 보충하여 주었으며 쉴라이어마허는 정통주의가 갖는 성경 중심적인 신학적인 틀을 깨어서라도 인간과 세계와 문화의 문제에게까지 갈 수 있도록 동기 부여를 하여 준 셈이다. 특히 자연신학과 하나님의 선교라는 문제를 개신교신학의 장에서 해결하기 위해서는 쉴라이어마허의 신학적 틀이 공헌하는 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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