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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안호목사(영국 아버딘 대학. M.Th., Ph.D.)

삼자원리와 존 로스의 선교방법

(부제 : 한국장로교회의 초기형성기[1874-1893]에 관한 연구)



서 론

한국교회는 선교 초기부터 요원의 불길처럼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여 최근에 이르러서는 미국 다음으로 제2의 선교사 파송국이 되었다. 이와 같은 한국 장로교회의 놀라운 발전과 성장의 원인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여러 각도로 분석되고 연구되어 왔다. 그 원인들 중의 하나로서 선교 초기에 '내한 장로교선교사 공의회'에서 채택한 네비우스 선교방법론을 한국교회가 채택하였기 때문이라고 하는 사실을 별다른 이의 없이 그대로 수용하여 왔다. 그러나 이는 다분히 미국선교사들의 영향력에 의한 것으로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초기 한국장로교회 형성과정에서 미국의 선교사들이 공식적으로 한국에 입국하기 전에 이미 존 로스에 의한 토착교회 지도자들이 든든히 세워져서 저 북녘 땅 간도지방의 한인촌과 지금의 북한의 의주·소래, 그리고 서울 일원에 상당수의 한국교인에 의한 활발한 전도 활동으로 곳곳에 토착교회가 형성되고 있었다는 점을 먼저 주목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사실에 기초를 둔 한국의 초기 장로교회 역사에 관한 선교적인 연구는 실제로 많이 이루어져 있지 않았다.


사실상 한국교회가 비약적인 성장을 거듭한 것에 대한 선교적인 관점에서 그 해답을 찾는 작업은 좀더 일찍부터 있었어야 했다. 더구나 이제 1만여 명의 선교사를 파송하는 '선교대국'(?)으로 성장한 이 마당에 한국교회, 특히 한국장로교회가 어떻게 형성되고 그 급격한 성장발전의 배후에 어떤 선교방법 원리가 적용되어 왔는지를 조심스럽게 살펴보는 것은 앞으로 한국교회가 21세기의 세계선교를 좀더 내실 있게 추진하기 위해서도 매우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본 논문의 의도하는 바는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는 한국 초기 장로교회의 유아기에 대한 선교적인 고찰을 통해서 존 로스의 선교사역의 영향과 그를 통한 초기 한국 교인들의 활동상황을 이해함으로써 어떤 선교방법론에 의해서 한국교회가 형성되었는지를 살펴보려는 것이다. 둘째는 선교사들이 직접 들어갈 수 없는 특정 선교지역의(창의적 접근지역) 구체적인 선교활동이 이루어진 상황을 존 로스의 선교사역을 통해서 살펴봄으로써, 이와 유사한 상황에서의 선교방법을 위한 통찰력을 얻고자 한다.


다시 말하면 지금까지 존 로스는 사실상 한국교계에 알려지기는 최초의 신약성경 번역자 정도였다. 그러나 그가 왜 만주 선교사로 39년간 선교활동을 하면서 "부산물적인(by-product)" 한글 신약성경 번역 사역을 감당했는지, 그 동기와 그 선교전략의 원리가 무엇이었는지를 새롭게 연구하는 것은 한국장로교회의 초기 형성기의 역사적인 실체를 바르게 이해하는 것과 아울러서 또한 앞으로 한국교회의 21세기의 세계 선교를 감당하는데 역사적인 교훈과 통찰을 얻을 수 있다는 면에서 커다란 유익이 있을 것이다.



1. 19세기 토착교회의 이론(삼자원리)과 북동중국의 초기선교


1.1. 헨리 벤(Henry Venn, 1796∼1873)


19세기 중엽의 삼자원리 또는 토착교회 선교이론은 세계선교에서 대단히 중요한 선교방법론이었다. 헨리 벤은 영국 CMS(Church Missionary Society)의 수석총무로 약 40년간 종사하면서 토착교회의 이론인 삼자원리를 개발 정립하였다. 헨리 벤은 선교부의 총무로서 수많은 현지 선교사들과 서신왕래와 보고서를 주고받으면서, "What gave a church integrity?"라고 물었다. 즉 교회는 자기 정체감(self-worth)을 가져야 하는데, 교회의 self-worth는 세 가지의 구성요소, 즉 세 가지의 원리로 이루어진다는 것-자급(self-support), 자치(self-government), 자전(self-propagation)-이다. 또한 헨리 벤은 당시 노예제도의 폐지를 위해서 영국의회에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앞장을 서서 당시 여러 공공정책에 기독교적인 영향력을 최대한 발휘하는데 누구보다도 앞장을 서기도 하였다.


헨리 벤의 삼자원리를 비판하는 학자들(Stephen C. Neill)도 있었으나, 그것은 헨리 벤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전제되지 않은 비판으로 볼 수도 있다.



1.2. 루퍼스 앤더슨(Rufus Anderson, 1796∼1880)


루퍼스 앤더슨은 대서양을 사이에 둔 "미국의 헨리 벤"이라고 할 수 있다. 루퍼스 앤더슨은 무려 44년간 ABCFM(The American Board of Commissioners for Foreign Missions)의 상임총무로 재직하면서 벤과 같이 거의 동시대에 삼자원리의 이론을 체계화시켰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의 이론은 사전에 의논이나 한 듯한 일치점을 갖고 있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루퍼스 앤더슨은 "문명화가 아닌, 복음화를!"(Not Civilization, but Evangelization)을 주장했다. 그의 이론은 앤더슨의 수제자인 Robert E. Speer가 ABCFM의 총무로서 재직하면서 그대로 수용했고, 더 계승 발전시키면서 당시의 세계 각지, 특히 한국과 중국에 파송된 선교사들에게 자연스럽게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였을 것이다.


1.3. 존 리빙스턴 네비우스(John Livingston Nevius, 1829∼1893)


중국 산동반도에서 일생 동안 선교사역을 감당했던, 미국의 북장로교 선교사였다. 그는 선교 초창기에는 삼자원리를 알지 못하였기에 '쌀 신자'(rice christian)를 양산했으나, 후에 긴 안식년을 통해서 헨리 벤과 루퍼스 앤더슨으로부터 삼자원리를 충분히 배우게 되었다. 그리고 그의 선교 중반기에 들어서면서 삼자원리를 적용하면서 놀라운 선교결실을 맺기 시작했다. 이에 대한 자세한 것은 이미 네비우스 선교방법론의 한국교회의 도입과 그 영향력에 관한 많은 논문과 저술들이 소개되었다.



2. 존 로스 : 스코틀랜드에서(1842∼1872)와 만주에서의(1872∼1910) 사역


존 로스는 스코틀랜드의 북동쪽, 갈릭어를 쓰는 하일랜드의 중산층의 아들로 1842년에 태어났다. 지금까지 존 로스에 대한 연구는 지극히 제한적인 범위 내에서만 이루어졌을 뿐이다. 존 로스는 11개 국어를 구사할 만큼 탁월한 언어능력의 소유자로서 어려서부터 미지 세계에 대한 강렬한 동경심을 갖고 있었다. 그는 먼저 에딘버러에서 신학을 하면서 하일랜드의 복음화를 생각하면서, 그곳에서 일생동안 목회할 것을 기대했으나, 그는 그 당시 신학교에서 선교현지에서의 시급한 요청을 들으면서 깊은 고민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결국 중국 선교에로 부르신다는 것을 오랜 동안 고민끝에 1872년도에 중국 '지프'(Chefoo)에 도착하였다. 그 후 그는 더욱 더 전략적인 선교를 위해서 교단 선교부를 강력하게 설득해서 중국 북동부 만주로 선교 기지를 옮기게 된다. 그의 한국선교의 구체적인 동기와 꿈을 갖게 된 계기는 지프와 산동성에서 옮겨가는 과정에서, 한국선교 중 순교한 토마스 선교사에 대한 소식과 알렉산더 윌리암슨(Alexander Willamson)의 영향을 받아 한국 선교에 지대한 관심을 갖게 된다. 로스의 한국 선교에 본격적인 시도는 1차 고려문(Korean Gate) 방문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1874).


로스가 만주 선교에서 삼자원리에 의한 사역을 본격적으로 감당하여 궁극적으로 만주에서 독립적으로 토착화된 만주의 토착교회를 세우게 된다. 이와 같은 로스의 선교방법원리와 전략은 로스의 선교현장과 그의 저술 자료들을 참조할 때, 그가 삼자원리를 충분히 이해하고 이를 충실히 적용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로스의 대표적인 십여 가지의 저서들은 다음과 같다 : Mandarin Primer: Being Easy lessons for Beginners, Transliterated According to the European Mode of Using Roman Letters(Shanghai, American Presbyterian Mission Press, 1876), and Corean Primer : Being Lessons in Corean on All Ordinary Subjects, Transliterated on the Principles of the Mandarin Primer(Shanghai: American Presbyterian Mission Press, 1877). History of Corea, Ancient and Modern: with Description of Manners, Customs, Language, and Geography(1879), The Manchus, or the Reigning Dynasty of China: Their rise and Progress(1880), Korean Speech with Grammar and Vocabulary(1882), Old Wang, the First Chinese Evangelist in Manchuria: A Sketch of His Life and Work, with a Chapter upon Native Agency in Chinese Missions (1889).


또한 다음의 저작들은 선교 후반기에 저술한 것으로 그의 풍부한 만주와 한국선교의 경험을 토대로 한 그의 선교방법론과 중국 문화와 역사에 관한 깊은 통찰력을 엿볼 수 있는 작품들이다. 특히 'MMM'은 본 논문을 쓰는데 더없이 귀중한 자료가 아닐 수 없다 : The Boxers in Manchuria(1901), Mission Methods in Manchuria(1903), The Original Religion of China(1909) , The Origin of the Chinese People(1916).



3. 만주에서의 로스의 한국 사역


로스는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미 1879년도에 한국의 역사책을 영어로 저술 출판할 정도로 한국 역사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기에 그는 그 당시 한국을 '미전도 종족'(Unreached People)으로 인식하고 시급히 복음이 증거되어야 할 것으로 훤히 내다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 대원군의 기독교와 가톨릭에 대한 핍박으로 만주에 이민 와 있던 많은 한국인들을 접촉하고 1차 고려문 방문(1874)을 통해서 복음전도의 가능성을 이미 직시하고 있었다. 로스는 두 차례의 고려문 방문을 통해서 한국선교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수집과 그의 개인 어학교사를 찾아 한국 언어와 문화를 본격적으로 연구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1879년에 최초의 한국인 세례자를 갖게 되었고, 그의 매부인 매킨타이어가 본격적으로 성경번역팀에 합류하게 됨으로써 본격적인 한글성경작업이 중단되지 않고 계속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 이미 로스는 한글이라는 한국민족의 독특한 토착 언어를 통해 한국 선교의 장래를 밝게 내다보면서 말하기를 "a new people, a new country, a new language opening up to the Christian church"이라고 한국교회의 미래를 예언한 바 있다.

그 결과 1882년 3월에 누가복음이 번역 출판되었고, 그 5년 후에《예수셩교젼셔》(1887)를 완성·출판하게 되었다.



4. 로스의 성경 번역팀(Ross' men)의 전도와 선교방법


로스는 성경번역에 심혈을 기울인 끝에 네 단계에 걸쳐 섬세한 번역을 이뤄냈을 뿐 아니라, 이 번역 성경을 보급하는 데에도 지대한 관심을 기울였다. 이를 번역하는 동안, BFBS(The British and Foreign Bible Society)와 NBSS(National Bible Society of Scotland)에서 비용을 부담했다.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해야 할 것은 우리 정부의 고위관리로서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활약하기도 했던 이수정은 일본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복음을 접하게 되었고, 그 후 그는 열정적으로 한국선교의 비전을 품게 되었다. 그는 한국의 마케도니아인(A Korean Macedonian)으로 당시의 미국교회에 장문의 편지를 보내어 한국에 선교사들을 파송해 줄 것을 호소했다. 한편 그가 번역한 마가복음은 번역상의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고, 이를 보급하는 데에서도 로스와는 달리 "일본인" 매서인을 동원했다는 점에서 더욱 큰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그 방법론은 로스의 토착이론과는 거리가 먼 것으로서, 실제로도 별 열매를 맺지 못했다.


이에 반해서 로스의 매서인인 이응찬·백홍준·김진기·이성하·이익세·최성균·서상윤·서경조는 성경 번역팀에 참여하고 또한 함께 훈련받았으며, 간도·소래·의주와 서울에서 기독교 공동체를 형성해 갔다. 우리는 이들 네 곳의 기독교 공동체에서 'self-propagating christian communities, self-governing christian communities, self-supporting christian communities'가 형성된 것을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다.


로스는 그의 39년 만주선교 기간 동안 그리고 오랜 기간의 한글성경 번역팀들과 함께 한국 언어, 문화와 역사에 관한 책들을 쓰면서도 그의 40년의 선교사역 기간중 단 한 번 한국을 방문하게 된다. 1887년 9월에 있었던 서울 최초의 공교회였던 새문안교회 직분자를 세우는 예배에 참여하게 된다. 그러면서 그는 직분자를 세우는 자리에서 자신의 선교 열매를 확인하는 뜻 깊은 순간을 맞이했던 것이다.


이때 로스는 언더우드와 한국에서 선교사역을 활발하게 감당하던 미국의 여러 선교사들도 만나게 된다. 당시의 미국 선교사들은 매우 젊었고, 선교훈련과 선교정책의 부재로 인해 단지 선교열매에 참여하는 수준이었다.


로스역 성경은 앞서 언급한 이수정역에 비하면, 여러 면에서 탁월한 번역이었다. 그러나 로스역도, 이수정역의 최초개정판이 나온 이래, 1893년에 더 이상 사용하지 않기로 내한선교사들에 의해서 결정되었다. 바로 이 해에 선교사공의회(Council of Missions)가 구성되고, 이 기구에서 네비우스 선교방법론이 공식적으로 채택되고 또한 소위 '선교지 분할 협정'(Comity Arragement) 역시 이 해에 이뤄진다.


로스의 선교방법론은 그의 저서인 "Mission Method of Manchuria"(1903)에서 밝히고 있으며, 그의 소논문, 보고서, 그리고 설교(addresses)를 통해서도 그의 토착교회 선교방법론(삼자원리)을 밝히 볼 수 있다. 이러한 로스의 선교방법론은 기본적으로 바울사도의 선교적 자질과 태도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하겠다.


로스의 선교방법론을 요약하자면, 다음 네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그 첫째는 광범위한 초기 전도여행을 통해서 선교지의 문화, 역사, 그리고 언어를 습득하는 단계, 둘째는 자전(自傳, self-propagation)을 통해서 "좀더 건강하고, 좀더 견고하며, 그리고 좀더 효과적인" 교회를 세우고, 셋째는 자치(自治, 로스는 self-government 보다는 self-reliance라는 표현을 더욱 선호했음)를 통해서 스스로 결정하는 교회를 세우려고 했는데, 이것이야말로 교회가 내구력을 가지는데 가장 안전한 길이라고 믿었다. 넷째는 선교비의 출처 문제에 있어서 네비우스에 비해서 상당히 융통성 있는 자급(自給, self-support) 정신을 가지고 있었다.



5. 삼자원리와 한국 초기 장로교회


로스와 네비우스의 관계는, 앞서서 살펴본 헨리 벤과 루푸스 앤더슨 사이에서 보게 되는 놀라울 정도의 유사성을 다시금 보여준다. 이 두 선교사는 중국이라는 동일한 현장에서 삼자원리를 더욱 발전적으로 적용시켰다. 그리고 이들은 모두 한국교회 초기선교에 서도 지대한 공헌을 했다.


로스의 기록에 의하면, 로스와 네비우스는 단 한 번 1887년 9월 로스의 한국 방문길에 서로 만나서 밤을 세워가며 서로의 선교방법론을 깊이 있게 논의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미 로스는 이전부터 네비우스의 선교방법론에 대해서 주의 깊게 읽어 알고 있었으며, 당시 네비우스를 만났을 때는 보다 깊이 있는 대화들을 나눈 것으로 되어 있다. 이 대화에서 네비우스가 말하기를, 그는 자급의 원리에서 자신보다 융통성이 있었던 로스의 방법이 자신의 엄격한 태도보다 더 옳았음을 간접적으로 시인했다.


네비우스의 선교방법이 한국에 도입될 때는 기존에 견지해오던 입장보다 로스적인 요소들을 가지고 있다. 한국에서 오랜 동안 선교사역을 감당해왔던 Charles Allen Clark은 그가 따랐던 네비우스 방법론을 아홉 가지로 요약했다. 그러나 1893년도 장로교 공의회에서 채택한 네비우스 선교방법론은 열 가지로 요약되는데, 이는 앞서 요약되어 소개된 네비우스의 방법론이 상당부분 "수정"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수정된 부분에서 주된 선교 대상자를 소수의 상류계급이 아닌 대다수의 노동자 계급과 여성층으로 조정한 것은 로스가 한글을 성경번역어로 채택한 것과 아울러서 그의 선교적 탁월한 통찰을 엿보게 한다. 이밖에도 로스의 토착화에 대한 정신은 교회건축물, 사경회제도나 전도부인(Bible women), 성경중심의 교회로 한국교회가 토착화에로 나아가는데 보다 균형 잡힌 영향력을 주었다.



결 론


"Without Jesus no Paul and no Nazarenes; but without Paul no world Christianity."

우리는 앞에서 보아온 것처럼 미국선교사들의 본격적인 선교활동 이전에 로스의 한글 성경과 한국 토착전도자들(Ross' Men)에 의한 기독교 복음전파가 광범위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점을 고려할 때, 로스의 선교방법론과 선교정책을 제외하고는 한국 초기교회의 형성과정을 온전히 설명할 길이 없다.


4장과 5장에서 보았듯이, 간도·소래·의주·서울 지역에서 형성된 초기 장로교 공동체는 삼자원리에 의해서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 또한 로스 자신의 선교 방법 원리를 자세히 설명한 그의 말년의 저서인 "MMM"에서도 삼자원리에 입각한 만주와 한국 선교사역원리를 살펴볼 수 있음을 4장에서 확인하였다.


그리고 지금까지 알려진 네비우스 선교원리가 로스의 선교원리에 비해서 상당히 불균형적인 측면을 가졌던 것은, 네비우스 자신의 개인적인 선교경험으로 볼 때 우리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한국 초기 장로교회 공동체의 형성에서 주된 요인은 네비우스 선교방법론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로스의 토착선교이론에 입각한 균형 잡힌 삼자원리에 의한 것이었다고 평가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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