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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찬교수('전통 예배'와 '생활 예배')

본 글은 김영찬 교수가 주장하는 예배에 관한 글입니다

Nyskc Movement와 다를 수 있으나 똑같은 주제 속에서 다른 주장을 하는 것을 비교하고자 올린 것입니다

즉 생각이 다를 수 있는 글이지만 참고로 보셨으면 해서 퍼왔습니다



'전통 예배'와 '생활 예배'


'전통 예배'와 '생활 예배'에 대한 새로운 이해

'죄 사하는 예배' 멈추고 '생활 예배'로 탈바꿈해야


1. 전통 예배의 흐름


구약 시대의 제사(Sacrifice)란 하나님을 예배하는 신앙을 의식화한 종교 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제사를 히브리어로는 '제바흐'(zebach)라고 하는데 '도살하다'(Slaughter)라는 동사에서 유래한 말이다.

한편 헬라어로는 '수시아'(thusia)인데 이는 '바치다'(Offer)라는 뜻에서 온 말로 제물이라는 뜻으로도 사용한다. 따라서 제사(祭祀)란 원어적인 개념으로 볼 때 인간의 죗값을 대신하여 동물을 죽여 희생의 제물로 바친다는 뜻으로 볼 수 있다.


제사의 종류는 목적에 따라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한다. 먼저 화목제(和睦祭)는 '쉘렘'이라고 하는데 '화평하다'라는 '솰람'에서 나온 말이다.

이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막힌 것을 해소하여 화목과 친교를 얻기 위하여 드린 제사로 주로 국가적인 경축일이나 제사장의 성별식 또는 나실인의 구별 의식 때 드렸다.

개인적으로는 서원하거나 자원할 때 또는 감사의 제사를 드리고자 할 때 화목제를 드렸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3장 25절에서 주님께서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영원하신 화목 제물로 드려졌다고 하였다.


속죄제(贖罪祭)는 '핱타아트'라고 하며 지은 죄를 용서받기 위하여 드리는 제사로 성경에 나오는 모든 제사 중에서 가장 중요하고 기본적인 것이다. 피 흘림 없이는 죄 사함이 없다(히 9:22)고 하였지만 가난한 자에게는 속죄의 제물로 곡식을 드리는 것이 허용되기도 하였다.

주님은 자신을 흠 없는 화목 제물로 드리셨을 뿐 아니라 피 흘려 죽으셨기에 속죄 제물(히 9:12)이기도 하다.


속건제(贖愆祭)는 '아샴'이라고 하는데 제물이나 성물(聖物)에 대하여 거룩하게 유지하지 못하여 허물이 있을 때와 인간관계에서 손해를 끼쳤을 때 용서받기 위하여 드리는 제사였다. 따라서 속건제는 다른 제사와 달리 희생 제물의 피 흘림 대신 실제적인 배상이 뒤따르는 것이 특징이었다. 속건제를 드리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절대적인 하나님의 공의와 거룩성으로 다스려진다는 사실을 깨우치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다.

우리의 경건과 거룩을 위하여 주님께서는 자신을 속건 제물(사 53:10)로도 드리셨다고 하였다.


곧 주님의 죽으심으로 우리가 거룩함을 얻게 되었다(히 10:10, 13:12)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속죄제와 속건죄를 비교하자면, 속죄제가 주로 하나님께 지은 죄로서 1-4 계명을 어겼거나 내면적인 죄에 대해 용서를 구하는 것이라면, 속건제는 주로 사람과의 관계에서 지은 죄 곧 5-10 계명을 어긴 죄에 대하여 용서를 구하는 제사였다. 즉, 속죄제는 원죄로부터의 용서를 상징하는 제사로 볼 수 있고, 속건죄는 죄 사함 받은 이후의 거룩한 삶을 유지하지 못하고 자범죄를 지은 데 대하여 끊임없이 회개해야 한다는 것을 상징한다.


제사는 대제사장이 행했는데 대제사장은 온 백성을 위한 속죄 제사를 드리기 전에 먼저 자신을 위한 속죄부터 해야 했다. 따라서 자신을 위한 속죄 제물인 수송아지 한 마리를 번제단 앞에서 잡아서 그 피를 취하여, 성소를 지나 지성소에 들어가서 뿌려야 했다.

지성소 휘장에 들어가기 전에 금향로에 향을 태워 연기를 피운 다음, 그것을 짐승의 피와 함께 가지고 들어가서 지성소 안에 연기를 가득하게 한 후에 법궤 위에 놓인 속죄소 위와 동편에 짐승의 피를 일곱 번 뿌렸다.


그 다음 지성소를 나온 대제사장은 온 백성을 위한 속죄의 염소를 잡아 그 피를 가지고 다시 금향로와 함께 지성소에 들어가 속죄소와 그 앞에 뿌렸고, 다시 나와서 번제단 앞으로 간 다음 먼저 잡은 수송아지와 염소의 피를 취하여 번제단 귀퉁이 뿔에 바르고, 또 그 피를 일곱 번 뿌려 속죄 제사를 드렸다.

여기까지 행한 대제사장은 이제 한 마리 남은 염소에게 안수함으로써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불의와 범죄를 염소에게 전가한 후에 그 염소를 무인(無人) 광야로 떠나보냈다. 랍비의 구전에 따르면 광야로 아사셀을 위하여 보낸 염소는 낭떠러지에서 떨어트렸다고 한다.


속죄 제사를 끝낸 대제사장은 이제 속죄 제사를 하나님께서 열납하신 것을 확인하기 위해 자신을 위한 번제로 숫양 한 마리를 잡아 불에 태워 바쳤으며, 또 백성들을 위한 번제로 숫양 한 마리를 잡아 불에 태워 드리며 모든 제사를 마친다.


구약의 제사는 절차가 복잡했지만, 그 제사 형식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며 제사가 담고 있는 의미가 더욱 중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구약의 속죄 제사는 근본이 동물의 희생 제사였다. 즉 흠 없는 동물에게 안수하여 인간의 죄를 제물에게 상징적으로 전가시킨 후 제물로 바치는 동물을 죽임으로써, 인간이 치러야 할 죄의 대가를 동물이 대신 치르게 하여 죄를 용서받는 상징적 행위였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완전한 제사의 그림자이며 신약의 제사 모형이었음을 알아야 한다. 주님께서 완성하신 완전한 제사는 주님께서 자신의 죽으심을 통해 단번에 드리는 영원한 제사를 말한다.

히브리서 7장 27절에서 대제사장들이 자신과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드리는 것처럼 하지 않고 주님이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다고 한 것과 히브리서 10장 12절에서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영원한 제사를 드리셨다는 말씀을 통해 알 수 있다.


주님께서는 우리 죄를 대신해 흠 없는 희생 제물인 자신을 하나님께 드려 제사의 본질을 완성하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주님의 완전한 제사로써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존재하던 휘장이 찢어지고 하나님과 인간이 완전한 화목을 이루게 하여 제사의 본질을 완성하셨다는 뜻이다.


이제 우리는 대제사장의 어떤 도움도 없이 주님으로 인하여 하나님 아버지를 직접 만날 수 있게 된 것이다. 결국 히브리서 10장 18절에서 말씀하는 바와 같이 더 이상 대제사장을 통한 제사 자체가 필요 없게 되었다. 성경의 모든 개념은 계시의 점진성에 따라 신약에서 그 본질적 의미가 드러난다.


구약적 개념의 제사 역시 주님께서 십자가상에서 이루신 구원 사역의 성취로 말미암아 그 본질적 개념이 확연하게 드러났다. 즉 구약의 제사는 완전한 제사의 그림자였고, 마침내 신약에 와서 성도의 삶을 통하여 드리는 산제사의 개념이 정립되었다는 것이다.

('1. 전통 예배의 흐름'은 안유섭 목사님 글을 요약한 것이다: 아르케 아카데미 원장·반석교회)


2. 예배에 대한 하나님의 가르침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구약 시대에 일반적으로 드리는 예배는 죄를 사하려는 예배였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어 구약적 예배의 중심이었던 죄사함 의식은 의미가 없어졌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구약의 모든 예언과 율법이 그 분에 의해 온전히 성취되었다. 따라서 구약적 전통 예배의 굴레에서 벗어나 이제는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산 예배로 탈바꿈해야 한다.


어느 날 예수께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 예배에 관한 가르침을 주신다. 요한복음 4장 21절에서 예수께서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여자여 내 말을 믿어라. 그리심산에서도 아니고 예루살렘도 아닌 곳에서 아버지께 예배드릴 때가 온다. 예배는 어디서 드리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떻게 드리느냐가 중요하다.

너희 사마리아 사람들은 하나님을 잘 알지 못하고 맹목적으로 예배를 드리지만 우리 유대 사람은 하나님을 알고 예배를 드린다. 이는 구원이 유대 사람들에게서 오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다. 그러니 우리는 반드시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 아버지께서 이런 예배를 우리에게 원하신다." (현대어성경)


오늘날 교회당은 구약의 성막과 성전 개념과 동일하다.

유대인들이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예배를 드리듯 현대 교회도 예배를 위해 교회당을 제일 먼저 구입하거나 건축하고 있으며, 안뜰은 신도들이 앉는 좌석이며, 지성소는 제단이라고 불리는 강단이다.

그래서 한 때는 일반 신도들은 강단에 올라갈 수 없었다. 그리고 대제사장은 예배를 주관하는 성직자들이고 제물은 각종 헌금이 대체하고 있다. 헌금 명목도 인위적으로 만들어 그 종류가 매우 다양하다. 이와 같이 현대 교회 예배 형식은 구약의 성전과 제사 형식을 답습한 '죄 사함' 식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보듯이 이미 예배의 장소와 형식 그리고 예배의 의미는 새롭게 달라졌다.

이제 예배 장소와 형식은 아무 의미가 없다.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특히 지나친 헌금을 투자해서 교회당을 건축하는 것은 하나님께 전혀 영광이 되거나 기쁨이 되는 헌신이 아니다.


이는 도리어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하여 담임 목회자가 명예와 영광을 도둑질하는 꼴이다. 그리고 예배 형식에 있어서 꼭 담임 목회자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영원한 대제사장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역할을 완전무결하게 해결해주신 것이다.

일반 신도들도 예배를 인도할 수 있고, 설교도 할 수 있으며, 심지어는 세례도 베풀 수 있다. 또한 예배 순서에도 구애받지 않아도 된다. 이는 예배 형식이 전통에서 신령과 진정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소돔의 통치자들과 같은 너희 예루살렘 통치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어라. 고모라 백성과 같은 너희 백성들아, 우리 하나님의 가르침에 귀 기울여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다.


'나는 너희가 바친 이 모든 제물을 바라지 않는다. 이제는 너희의 숫양 번제물과 살진 짐승의 기름이 지겹다. 수송아지와 양과 염소의 피도 반갑지 않다. 너희는 나를 만나러 오지만, 누가 너희더러 이렇게 들락날락하며 내 마당만 밟으라고 했느냐?

다시는 헛된 제물을 가져오지 마라. 너희가 태우는 향이 역겹다.

너희가 초하루 축제일과 안식일과 특별 절기에 모이는 것도 참을 수 없고, 거룩한 모임에 모여서 악한 짓을 하는 것도 견딜 수 없다. 정말로 나는 너희의 초하루 축제일과 특별 절기들이 역겹다.


그것들은 오히려 내게 무거운 짐이 될 뿐이다. 나는 그것들을 짊어지기에는, 너무 지쳤다. 너희가 팔을 벌려 내게 기도해도 나는 눈을 감고 너희를 쳐다보지 않겠다.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해도 들어 주지 않겠다.

왜냐하면 너희 손이 피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너희는 몸을 씻어 깨끗이 하여라. 내가 보는 앞에서 하던 악한 짓을 멈추어라. 못된 짓을 그만두어라. 옳은 일을 배우고 정의를 찾아라. 억눌림 받는 사람을 구해 주고, 재판에서 고아들을 지켜 주며, 과부들의 억울한 사정을 들어 주어라.'" (사 1:10-17)


"내가 바라는 것은 제사가 아니라 진실한 사랑이며, 태워 드리는 제사인 번제가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지혜이다. 그러나 아담이 언약을 어겼듯이 너희도 언약을 어겼고, 내게 진실하지 않았다." (호 6:6-7)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께 나아갈까? 무엇을 가지고 높으신 하나님께 예배할까? 태워 드리는 제물인 번제물로,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주께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 마리 양을 기뻐하실까?

강줄기 만 개를 채울 만한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벗기 위해 내 맏아들이라도 바칠까? 내 죄를 씻기 위해 내 몸으로 낳은 자식이라도 바칠까? 사람아, 그분이 네게 말씀하셨다. 무엇이 선하며,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그것은 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며 너희 하나님과 함께 겸손히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 6:6-8)


"나는 희생 제물보다 자비와 사랑을 원한다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마9:13)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않는다는 그 의미를 너희가 알았다면 무죄한 사람을 정죄하지 아니하였으리라." (마12:7)


3. 신령한 예배, 일상생활 예배


예수님도 유일신 신앙을 자랑하는 유대교 전통과 제도권에 대해 단호히 거부하시며 짐승 취급을 받고 사는 사마리아 여인을 통해 진정한 예배가 어떤 것인지를 깨우쳐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영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께 예배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영과 진리로 예배해야만 하오." (요4:24)


"God [is] a Spirit: and they that worship him must worship [him] in spirit and in truth." (KJV)


"God is Spirit, and only by the power of his Spirit can people worship him as he really is." (GNT)


하나님은 영(靈)이시기 때문에 사람들의 형식과 습관에 젖은 인위적인 예배나 물질과 헌신을 요구하지 않으신다. 다만 하나님의 영 안에서 우리의 진실이 담겨진 참 마음으로 드려지는 예배를 받으신다. 이는 성령에 충만하여 나의 활동이 아닌 내 안의 성령이 활동하시는 모든 행위를 예배로 인정하며 그 예배를 기쁘게 받으시겠다는 의미이다.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가족이다. 하나님나라의 공동체이다. 이 공동체가 자연스럽게 교회로 불리는 것이다. 하나님을 진실로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모인 곳이 교회인 것이다.


어느 날 예수께서 많은 사람들 앞에서 복음을 전하실 때 예수의 어머니와 형제와 자매들이 찾아왔다. 가족이 찾아 왔다는 전갈을 받은 예수는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요 자매인가 하시며 사람들에게 누구든지 내 가족처럼 아버지의 뜻대로 사는 자가 내 어머니요 형제요 자매라고 하셨다. 아버지의 뜻대로 사는 사람들의 모임이 곧 교회인 것이다.


그러면 아버지의 뜻은 무엇인가? 하나님을 섬기는 참된 예배의 길은 어떤 것인가?


"옳은 일을 배우고 정의를 찾아라. 억눌림 받는 사람을 구해 주고, 재판에서 고아들을 지켜 주며, 과부들의 억울한 사정을 들어 주어라." (사 1:10-17)


"내가 바라는 것은 제사가 아니라 진실한 사랑이며, 태워 드리는 제사인 번제가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지혜이다." (호 6:6-7)


"그분이 네게 말씀하셨다. 무엇이 선하며,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그것은 자비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며 너희 하나님과 함께 겸손히 행하는 것이 아니냐?" (미 6:6-8)


"만일 누구든지 그리스도인이라고 내세우면서 함부로 말을 하는 사람은 자신을 속이는 것이며, 그런 신앙생활은 아무런 가치도 없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순수하고 흠이 없는 그리스도인은 고아와 과부들을 돌보아주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세속에 물들지 않고 주님 앞에 늘 진실하게 살아갑니다." (약1:26-27)


이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진정한 뜻이 무엇인지 밝혀졌다. 그것은 한마디로 국가와 피부와 종교와 신분 등을 초월해서 모든 지구촌의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이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데 교회당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데 담임 목사 제도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데 전통 의식이나 제도는 장애가 될 뿐이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은 특정 교인만이 누리는 특권이거나 교리(敎理)가 아니다. 성탄절의 설교 구호도 아니다. 지구촌의 모든 사람들을 향해 말씀하신 하나님의 뜻이요 지구촌 모든 사람들이 살아가야 할 삶의 목표요 일상생활이다. 그러므로 생활 영성이 필요한 것이다.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가 바로 생활 속에서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일이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자유가 뭔지 아는 사람들이다. 평화가 어떤 것인지를 아는 사람들이다.


세상에 널려있는 모든 종교 경전들이 한결같이 주는 가르침은 결국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다. 따라서 종교적 특권 의식을 갖는 것은 마치 유대인들이 선민의식을 갖고 교만을 부리는 어리석은 행위와 같은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의 입맛에 맞추어 사람의 교훈으로 전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닌 내 뜻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 주변에는 하나님과 예수의 이름으로 자기 배를 불리고 있는 성직자들과 신도들이 부지기로 많다.


이제 우리가 죄(罪)와 질병으로부터 구원을 얻듯이 전통과 제도로부터 구원을 얻어야 한다. 전통과 제도권에 묶인 자로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 낡은 전통과 제도의 부대를 기꺼이 버려야 한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낡은 전통과 제도의 부대를 버린다는 것은 자기를 부정(否定)하는 일이다. 자기를 부정한다는 것은 육신을 만족시키려는 사사로운 모든 생각과 욕심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텅 빈 곳을 성령으로 채울 때 비로소 새 술을 새 부대에 담는 것이며 이를 일컬어 구원 또는 생명을 얻었다고 하는 것이다. 진정한 구원과 영원한 생명은 교회당과 전통이나 제도권에서 얻는 것이 아니고 일상생활 속에서 사랑을 통해 얻는 것이다.


이것을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는 교리와 대립하는 것으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사랑 안에 이미 믿음이 포함되어 있다. 사랑하는 것은 믿음이 있는 사람에게 자연히 나타나는 열매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행위를 포함한 믿음을 말한 것이며, 야고보는 믿음을 포함한 행위를 강조한 것이다.


우리는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과 숨을 호흡하면서 에덴에서와 같이 이웃과 교통하며 사는 것이 인생의 제1 목적임을 확인했다.


"하나님은 이 세상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지으신 분입니다. 그분은 하늘과 땅의 주인이시기 때문에 인간의 손으로 만든 신전에는 계시지 않습니다. 또한 인간의 손으로는 그분이 원하시는 바를 채워 드릴 수조차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필요한 것이 하나도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분 자신이 모든 인간에게 생명과 호흡을 주시고 필요한 것을 만족하게 채워 주십니다." (행17:24-25)


"이 백성이 나를 섬긴다고 주장을 하지만 사실은 말로만 나를 섬기고 높이며 마음은 내게서 아주 멀리 떠나 있다. 헛되이 내게 예배를 드리고, 사람의 훈계를 교리인 양 가르친다." (마15:8-9)


이제 죄 사함의 성격을 띠는 유대교식 전통 예배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성령과 나의 진실이 담긴 생활 예배로 탈바꿈해야 할 때다. 그 생활 예배란 다름 아닌 이웃과의 사랑 나눔이다.

어린 소자에게 냉수를 대접하는 것과 가난한 자를 먹이는 것과 나그네를 대접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대접하는 것이요(마 25:31-46)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이라고 하셨다.


영원한 생명 얻는 길을 물어보는 부자 청년에게도(마 19:16-22), 영원한 생명을 묻는 율법학자에게도(눅 10:25-37) 예수님은 생활 영성을 가르치셨다. 아무리 교회에서 헌신하는 사람이거나 성경에 해박한 지식을 가진 사람일지라도 생활 속에서 섬김과 나눔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위선(僞善)을 행하는 영원한 죄인으로 인생을 마감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는 예배나 설교와 공부의 자료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삶의 원리로 주어진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삶과 무관한 예배나 설교와 공부 등 교회 생활은 아무 의미가 없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배보다는 자비와 사랑을 나누는 삶을 원하시는 것이다.


이제 예배와 설교 중심인 의식(儀式)과 말(言) 잔치를 멈추고 겸손히 말없이 침묵 속에서 이웃을 섬기는 성령과 진리의 삶을 추구해야 한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품성(品性)이 드러나는 삶을 위해 교회당에서 나와 생활 터전으로 찾아가는 예배를 이루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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