룻기
룻기는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1:1), 이렇게 시작이 됩니다. 우리는 사사기 말미에서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있었던, 두 개의 부록을 대한 바 있습니다. 그렇다면 룻기는 사사시대에 있었던 또 하나의 부록인 셈입니다. 이점이 왜 중요하냐 하면 사사기는 룻기가 있음으로 말미암아 온전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룻기로 말미암아 온전해지는 사사기
주님은 안식일을 범했다고 비난하는 유대인들에게,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 5:17)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다시 말하면 하나님 나라를 회복하시기 위해서 어떻게 일해 오셨는가를 계시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에는 일관성(一貫性)과 통일성(統一性)과 점진성(漸進性)이 있습니다.
마치 창세기라는 시발역(始發驛)으로부터 계시록이라는 종착역(終着驛)까지 놓여있는 선로(線路)와 같고, 고층건물에 비한다면 골조(骨組)와 같은 뼈대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나눌 수도 없고, 떼어놓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 이를 가리켜 바울은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취었던 비밀의 경륜”(엡 3:9)이라고 말씀합니다. 이를 증거 해주어야만 뼈대있는 신앙이 되어서 견고하게 설 수가 있는 것입니다.
룻기가 이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룻기는 사사기와 사무엘상 사이에 놓여있어서 마치 척추 사이에 끼어 있는 연골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그러므로 룻기를 교훈적으로 접근하여 구속사라는 맥락을 무시하게 되면, 사사기와 사무엘상의 연결고리가 끊어지게 되고 맙니다.
교훈적인 설교의 한계(限界)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한다면 하나님께서 이루어오신 구원계획을 해체(解體)시키는 결과가 되고 맙니다.
룻기에 대한 전통적인 관점은 암흑기였던 사사시대에, 찬란하게 빛을 발하는 샛별처럼 룻의 효행이나 희생적인 사랑에 초점을 맞추어 가정의 달의 단골 메뉴로 취급되어 왔습니다.
그렇게 한다면 룻기는 춘향전이나 심청전과 같이 권선징악(勸善懲惡)의 윤리적인 작품은 될지언정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은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룻기의 연결고리
사사기는,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삿 21:25) 하고 끝을 맺고, 룻기는, “이새는 다윗을 낳았더라”(4:22)하고 끝을 맺고 있습니다.
이를 대할 때에 당연히 물어야만 합니다.
무엇을 말씀하기 위해서 “다윗을 낳았더라” 하고 말씀하는가?
룻기에 등장하는 중요한 인물은 “룻과, 보아스”입니다.
보아스는 룻을 맞이하여 오벳을 낳았습니다.
그런데 룻기는 “오벳을 낳았더라” 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벳은 이새를 낳았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더라” 하고 “다윗”이라는 인물까지 더 나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둔감한가를 보십시오.
다윗은 이새의 맏아들이 아니라 막내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이새는 다윗을 낳았더라” 하고 끝맺는 것일까요?
왕이 없던 그 때에 하나님은 왕을 준비하고 계셨음을 계시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룻기서의 핵심적인 주제입니다.
그리고 룻기 다음 책인 사무엘상에서, “너는 기름을 뿔에 채워 가지고 가라 내가 너를 베들레헴 사람 이새에게로 보내리니 이는 내가 그 아들 중에서 한 왕을 예선하였음이니라”(삼상 16:1) 하고, 예선해 놓으신 왕이 다윗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하기 때문에 룻기가 아니면 사사기가 온전해지지 못한다고 말씀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주목해야할 점은 다윗의 족보를 보아스로부터 시작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베레스의 세계(족보)는 이러하니라”(4:18) 하고 “베레스”까지 소급해 올라가고 있다는 것과, 베레스는, “다말이 유다에게 낳아준 베레스”(4:12)라고 설명해 줌으로 다윗의 뿌리가 유다 지파 자손임을 밝혀주고 있다는 점입니다.
성경의 통일성과 점진성
“다윗”의 뿌리를 유다까지 거슬러 올라가 보여주는 의도가 무엇인가?
성경은 창세기에서 유다에게,“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즉 왕)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창 49:10) 하고 예언한 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선해놓으신 다윗이 이 정통(正統)을 이어받은 줄기임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이 구속사의 맥은 여기가 끝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내가 네 몸에서 날 자식을 네 뒤에 세워 그 나라를 견고케 하리라, 네 집과 네 나라가 네 앞에서 영원히 보존되고 네 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삼하 7:12-16) 하고 세워주신 언약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다윗 언약은,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 노릇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눅 1:20-33)에서 성취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룻기에 나오는 다윗의 족보(4:18-22)가,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마 1:3-6)와 일치함을 보게 됩니다. 룻기는 구속사의 이 연결고리를 이어주고 있는 것입니다.
기업 무를 자
룻기서의 또 하나의 중요한 주제는 “기업 무를 자”입니다.
짧은 룻기에 12번이나 등장합니다.
기업 무를 자란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 받은 기업을 빚으로 인하여 잃게 되었을 때에,
그 값을 대신 갚아주고 잃었던 기업을 되찾아주어야 할 가까운 친족을 가리킵니다.
예를 들면 분배받은 땅을 잃었을 때, 자식이 종으로 팔렸을 때(레 25:25), 대를 이을 자식이 없이 죽었을 때, 계대결혼(繼代結婚)을 통해서 대를 이어주는 일 등입니다.
기업 무를 자의 자격요건
첫째, 가까운 친척이어야 하고,
둘째, 자원하여야 하고,
셋째, 능력이 있어야만 합니다.
룻기에서는 이 기업 무를 자로 보아스가 자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룻기의 줄거리는, 베들레헴에 살던 엘리멜렉이 그 땅에 흉년이 들매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으로 내려가는 것으로 이야기는 시작이 됩니다. 거기서 엘리멜렉과 두 아들이 죽고, 과부 시어머니와, 그곳에서 얻은 두 과부 며느리만 남게 됩니다.
그 중 한 자부 오르바는 시모 나오미를 작별하고 자기 신에게로 돌아가지만 룻은,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룻 1:16-17) 하면서, “그를 붙좇았더라”고 말씀합니다.
나오미는 룻을 데리고 고향 베들레헴으로 돌아옵니다. 나오미는 성읍 사람들에게, “나를 나오미(기쁨)라 칭하지 말고 마라(괴로움)라 칭하라,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나로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1:19-21) 하고 말합니다.
그러면 좇아오고 있는 룻에게는 어떤 소망이 있단 말인가? 없습니다.
그 점이 나오미가 자부들에게, “나의 태 중에 너희의 남편 될 아들들이 오히려 있느냐”(1:11) 하고 말한 데서 드러납니다.
이들에게 유일하게 남은 소망이, “기업 무를 자”입니다.
첫 번으로 가까운 친족 중 “아무개”는,“내 기업에 손해가 있을까 하여 무르지 못하겠다”(4:1, 6) 하고 나오미를 모른 체합니다.
이 때에 보아스가 기업 무를 자로 자청을 합니다. 그리하여 룻을 맞이하여 대를 이어줄 아들을 낳게 됩니다.
그러므로 룻기의 요절은, 4:14절이라 할 수가 있습니다.
“여인들이 나오미에게 이르되 찬송할지어다 여호와께서 오늘날 네게 기업 무를 자가 없게 아니하셨도다” 하고 찬양을 합니다.
여인들은 보아스나 룻을 찬양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기쁨”(나오미)을 잃어버리고 “괴로움”(마라)이 되어 돌아온 그에게, 기업 무를 자가 있게 해주신 것은 자신에게 그럴만한 가치가 있어서가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가야만 합니다.
우리에게 기업 무를 자가 있게 하신 하나님
성경은, 나오미의 기업을 회복시켜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인류의 시조가 잃어버렸던 기업을 회복시켜주시기 위해서 우리의 기업 무를 자를 없게 아니하셨다는 계시입니다.
이점을 히브리서 2장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형제라 부르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셨다”(히 2:11)고 말씀합니다.
어떤 처지에 있는 자들을 형제라 부르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셨는가?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히 2:15),
다시 말하면 죄 값에 팔린 자들입니다. 이는 체면(體面)의 문제가 아니라 책임(責任)의 문제였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가까운 친족이 되어주시기 위해서 우리와 같은 “혈육”을 입고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 하심이라”(히 2:17) 말씀합니다.
“구속하려 하심”, 이는 값을 대신 지불해주고 자유케 함을 뜻합니다.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히 2:9) 말씀합니다. 이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입니다. 그러므로 룻기에서 여인들이 보아스를 찬양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찬송할지로다 여호와께서 오늘날 네게 기업 무를 자가 없게 아니하셨도다” 하심은 이를 통해서 우리를 인류의 기업 무를 자가 되시는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기 위해서입니다.
성취하기까지 쉬지 않으시는 하나님
나오미는 룻에게 말합니다.
“내 딸아 이 사건이 어떻게 되는 것을 알기까지 가만히 앉아 있으라 이 사람이 오늘날 이 일을 성취하기 전에는 쉬지 아니하리라”(3:8). 그렇습니다. 잃었던 기업을 회복하는 일에
나오미나 룻이 보태야할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가만히 앉아 있으라” 뿐입니다.
오직 “그 사람이 이 일을 성취하기 전에는 쉬지 아니하리라”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속사역을 성취하시기 전에는 결코 쉬지 아니하십니다(사 9:6-7). 이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역입니다.
출애굽 당시, 홍해와 추격해오는 바로의 군대 사이에 끼어서 절망하는 백성들에게 모세는 외쳤습니다.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출 14:13).
“일을 행하는 여호와, 그것을 지어 성취하는 여호와”(렘 33:2)의 일하심은 룻기서 전편에 걸쳐 나타납니다.
㉠ 사사시대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한 저들을 징벌하시기 위해서 “흉년”으로 치신(1:1) 일,
㉡ 하나님의 징계를 순히 받지 아니하고 피하여 모압으로 내려간 엘리멜렉의 가정을 징책하신(1:21) 일,
㉢ 그들이 부르짖자 “자기 백성을 권고하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신”(1:6) 일,
㉣ 그들이 떡집(베들레헴)으로 돌아왔을 때가, “보리 추수 시작할 때”(1:22)였다는 점,
㉤ 룻이 이삭을 주우러 간 것이 “우연히 엘리멜렉의 친족 보아스에게 속한 밭”(2:3)으로 인도하신 일,
㉥ 그 때 “마침 보아스가 베들레헴으로부터” 돌아와서 이삭을 줍는 룻을 만나도록 해 주신(2:4) 일,
㉦ 그리고 보아스가 기업 무를 자로 자원토록 해주신 일 등입니다.
궁극적으로 룻기의 주제
① 왕을 준비해주신 일과,
② 우리의 기업 무를 자가 없게 아니 하신 일입니다.
그래도 부족합니까?
룻은 보아스에게 이렇게 간구합니다.
“나는 당신의 시녀 룻이오니 당신의 옷자락으로 시녀를 덮으소서 당신은 우리 기업 무를 자가 됨이니이다”(3:9).
우리도 이렇게 간구하십시다.
“주여 당신의 의의 옷자락으로
이 종을 덮으소서 주는 우리의 기업 무를 자가 됨이니이다”.
우리에게 왕을 주시고, 우리에게 기업 무를 자가 있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하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