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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교회의 교회교육

개혁교회의 교회교육


개혁교회의 교회교육 1


의미와 필요성

이사야 30:18∼20,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너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 대저 여호와는 공의의 하나님이심이라 무릇 그를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도다 시온에 거하며 예루살렘에 거하는 백성아 너는 다시 통곡하지 않을 것이라 그가 너의 부르짖는 소리를 인하여 네게 은혜를 베푸시되 들으실 때에 네게 응답하시리라 주께서 너희에게 환난의 떡과 고생의 물을 주시나 네 스승은 다시 숨기지 아니하시리니 네 눈이 네 스승을 볼 것이며


현대 사회에서 한 국가나 사회 및 단체 안에서 가장 첨예한 문제들이 해결되는 장이 마련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더 사람이 필요로 한다. 자본이나 건물 등과 같은 재화보다 사람이 가장 귀한 것이다. 그런데 사람이 필요하다면 어떤 사람이 필요한가?


무엇보다 더 우선 믿을만한 사람이 많이 있어야 한다. 거대사회일수록 그리고 복잡한 사회일수록 그리고 사회를 지도하는 계층으로 갈수록 믿을만한 사람이 필요로 한다. 한국사회에서 고위 정치가들이나 관직들이 자주 바뀌는 것은 최고 지도자 곁에 믿을만한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물론 최고 지도자 자체가 믿을만한 사람이 못되었을 경우, 더욱더 그 주변에 믿을만한 객관적인 인재가 부족하기 때문에, 공적기간을 통해 밖에 드러났을 때, 문제들이 발생하고 그것으로 그 공적생활의 수명이 짧아진다고 볼 수 있다. 지도자로 부각이 되지 않았더라면, 오히려 그 인생에 대한 오점이 사람에게 알려지지 않아 좋은 이미지로 사람들에게 감추어져 있었을 사람이 많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사람에게 명예욕이나 욕심 및 자존심 등 인간의 심연 속에 있는 죄의 본성으로 나온 하찮은 것들이 위로 치박고 올라와 사람들이 그런 욕망들을 절제하지 못하는 것 같다. 그렇게 믿을만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여러 가지 능력들이 결합되어 있어야 되기 때문에, 더욱 더 찾기 어려운 것이라고 생각된다. 현대사회에서는 너무 복잡하여서 책임을 져야 할 내용이 많이 있다. 이런 책임을 져야 할 내용 때문에 능력이 갖추어진 사람을 요구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기초적으로 믿을만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말을 잔한다는 거나 공부를 잘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쉽게 말하면 최우선적으로 집 열쇠를 맡길 사람과 회사의 금고를 맡길 사람을 의미한다. 한국의 초등, 중등학교 교육은 완전 제로에 가깝다. 그런 의미에서 대입시험은 한국을 망치는 주원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람을 믿게 만드는 많은 요소들이 있다. 정직, 성실 혹은 신실, 근면 혹은 부지런함 등 많은 요소들이 있다. 이런 요소들이 없음으로 생기는 손해들을 국민경제가치로 환산하면, 천문학적인 숫자가 될 것이다. 미래공교육은 이 천문학적 숫자를 계산해 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점점 더 갈수록 그런 손실은 치명적인 재난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높다. 물론 악이 없으면, 바보 사회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바보 사회가 될 것에 대해서 걱정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인간사회에서 악은 제거될 수 없고 그냥 놔 두어도 어디에서나 자연스럽게 생긴ㄴ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둘째로 거기에는 믿을많나 사람만 아니라, 그것과 함께 능력이 있는 사람이 필요로 한다. 물론 고등교육에서는 사람의 능력문제를 해결해야 할 많은 과제들을 안고 있다. 예를 들어 한국에서 가장 신뢰받은 직업으로 존경받고 있는 어떤 환경미화원이 만약 단지 외부적으로 보이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조그만 쓰레기라도 보이지 않는 곳에 가만히 숨겨 둔다면 그 미화원은 믿을만한 사람이 못될 것이다. 그런데 길이 넓지 않은 동네 차도에 신호등이 설치되어 있는데 자동차도 많이 다니지 않고 인적이 드문 시기에 파란 신호등을 오래 기다려서 건너는 시민정신이 요한다고 한다면, 그런 시민정신을 시민들에게 요구하기 전에 도시 교통신호체계에 대한 잘못을 지적하는 복합사회의 능력문제가 선행되게 마련이다. 이런 능력문제가 고도로 민주화되기 전의 사회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지만, 그런 고도로 민주사회를 가고자 노력하는 이상, 그런 복합사회의 경우에는 단순히 믿을만한 사람들이 많이 있다고 해서 사회가 운영되는 것이 아니라느 사실은 그것을 통해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런 문맥에서 현대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저축이 미덕이 아니라 패망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는 것도 잘 아는 사실이다. 오늘날 은행이자가 낮아졌다는 것은 자본사회가 선진국형으로 바꾸어 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돈이 빠른 유통상태를 통해 가치를 창조하지 않으면 아무런 쓸 데 없는 휴지종이가 되어야 된다는 것은 돈 자체의 본질에 가깝고 좋은 사회로 가는 징조로 보아도 될 것이다. 즉 돈조차도 무엇이 중요한 것인지를 가리켜 주는 이정표 역할만 하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의미에서 믿을만한 사람에게 능력이 겸비해야 한다. 그러나 능력 중에서 현대사회에서는 특별히 창조적 능력을 가진 자가 미래 국가사회에는 많이 필요로 한다. 교육과정에선느 지금까지 창조적 아이디어를 잘 배우는 것으로 족하다. 그러나 사회에서 진정 필요로 하는 것은 지금까지 생각하지 못한 아이디어이다. 다른 사람들이 다 잘 알고 있는 모든 아이디어들은 모두 잘 알고 있는 사람들로 가득차도 창조적 한 아이디어가 없으면 그 사회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다. 최전선에서는 창조적 한 아이디어만 필요로 한다.


셋째로 진리를 늘 추구하고 그 진리를 위해서 순교하기까지 희생하는 사람이 필요로 한다. 단체나 한 사회 혹은 거대사회에 있어서 그 사회의 방향과 관계되는 문제이다. 물론 진리가 무엇인가란 큰 문제가 있다. 그런 진리문제는 합리적 이성의 정상적 분별력이나 도덕적 양심이 스스로 아는 것이 대부분이다. 사람은 좋은 것을 좋은 것으로 아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것이 성경의 증거이다. 로마서에서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단순히 인간에게만 찾을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된다(롬1:20)고 하였고 일찍이 전도서의 증거에 따르면, 주께서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에 따라 아름다운 것을 지으셨다. 역시 그들의 마음에 영원한 것( )을 주시사,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하나님이 행하신 그 역사를 사람이 헤아릴 수 없도록 하셨다(전3:11)"고 기록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것을 좋은 것으로 알고 따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대부분 자연인들은 좋은 것을 좋은 것으로 스스로 알고 있음에도 그것 편에 서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럴 만한 많은 장애물이 있다. 성경은 처음부터 그런 장애물에 대해서 증거하되, 근원적으로 인간 안에 있는 죄의 소원( )이 있음을 지적하고 있고(창4:7), 홍수전이나 후나 사람의 악이 번창되어 있는 원인과 관련해서 사람의 마음에 일어나는 일들이 항상 오직 악할 뿐이라고 하였고 사람의 마음이 어려서부터 악함을 선언하고 있다(창8:21). 따라서 이런 마음에 있는 악의 근원은 이미 창세기 3장에 거슬러 올라가고 그 근원으로부터 양심, 숨는 행위, 두려움, 죄의 핑계 등을 그 결과로 얻을 만큼 깊은 뿌리를 내리어 있음을 지적한 셈이다. 우리가 흔히 내세우는 인맥, 지연, 자존심, 창피, 모멸감, 패배의식 등과 같은 많은 장애물들은 근본적인 것이 아님을 보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선을 좋아하고 추구한다는 것은 기적이 아니면 그런 일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음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이런 근원적인 악과 뒤섞여 있는 세속적인 진리의 경우일지라도, 그런 진리를 추구하는 일이 드문 일이고 더구나 최우선 진리를 앞세우고 그것을 위해서 생의 모든 것을 희생하여 진리를 택하는 경우란 아주 어려운 일일 것이다. 오히려 하나님의 보이지 않은 역사의 강제에 의해서 진리가 유지되고 보호된다고 함이 정당하다. 세상 안에 그의 택한 교회를 통해서 창조와 창조 이후의 모든 역사의 목적이 되는 내용을 드러낼 때, 그런 진리들은 사람들이 보화로서 가치화하기 어려웠고 그 가치를 드러내는 데 대부분 실패해 왔다. 성경의 모든 기록들이 실패의 증거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예를 들어 그 중에 율법이 그러한 선물 중 하나이다. 우리에게 가까운 것으로서 자연인에게도 좋은 것으로 발견되고 찬동이 되는 내용이다. 그런데도 그 선물의 가치는 모든 이들에게 동의되었고 이스라엘 밖에도 그런 진리는 드러나기도 했을 정도이다. 그러나 그 선물이 주어진 근원적 목적과 관련해서 이방세계와는 다른 것이었고 이스라엘 사람들도 잘 이해할 수 없었다. 이런 이스라엘의 실패를 보면서 성경의 진리가 이방세계에서 추구되는 그럴듯한 진리와 얼마나 크게 다른 지를 보여준다. 따라서 교회교육도 그런 진리의 근원적 가치의 질만큼 높은 것이다.


이런 면에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역사의 가치내용으로서 영원한 언약의 약속, 율법의 선물, 그리스도의 선물과 성령의 은택들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구원의 필연적 과정 혹은 서정으로서 성령의 은택들이 사적으로 혹은 공적으로 개인에게 적용이 될 때, 그런 하나님의 역사나 은혜의 오용되는 것을 보게 된다. 소명은 소명대로 회개는 회개대로 혹은 성화는 성화대로 오용이 되어, 인간론 중심으로 타락하는 수가 있다. 그런 오용의 예들이 완전주의나 신인협동설 등이다. 사람이 율법으로나 복음으로나 회개케 되었을 때, 그 자태가 겸손으로 나타나지만, 간증하는 자들 중에 회개를 즐기는 자들이 있다. 그것으로 자신을 높이는 수단들이 되어 있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개혁주의는 그런 여러 가지 인간이 빠질 수 있는 근본적 가식들을 비판하기 위해서 성경의 예리한 입장들을 강조한 특별한 삼위일체론, 기독론 및 성령론이 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영원히 예정된 자를 강조한다. 예정론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의 근원이 얼마나 깊은가에 대한 성경의 대답이다. 따라서 율법을 배우고 가르치라고 했을 때나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시고 가르치실 때나 혹은 사도들이 편지하면서 우리의 마음을 밝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알도록 권고하였을 때, 하나님의 역사와 교육을 분리하기 쉽다. 창조로부터 시작하여 하나님의 모든 역사 자체가 말씀이요 교훈이며 교육이다.


전체 결론에 해당되는 것은 이사야 본문에 있듯이, 과연 창조든지 섭리든지 우리가 살고 있는 터전, 실제의 삶이 과연 무엇을 의미할까, 늘 의문이 있을 수 있다. 그와 같은 물음에 대해서 그것은 하나의 교훈이고 스승이다. 좁은 비약을 한다면, 창조는 하나의 비유다(창세기). 칼빈의 말, 우리의 삶에 가장 중요한 터전이 되는 역사현장 전체를 하나의 참된 복을 향한 하나의 서곡이라고 한다. 여기서 다루는 내용들은 어떤 가정에 대한 교훈이든지, 개인의 발달사항, 국가사회가 갖는 미래의 교육의 성격, 교회가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보다도 좀더 본질적인 내용에 해당된다. 인간과 하나님 말씀 사이의 관계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 자신의 삶이 갖는 여러 형태는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간을 정확히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결론과 관련해서 중요한 포인트를 지적하게 된다. 현대사회에서 한 국가나 사회 및 단체 안에서 가장 첨예한 문제들이 있을 때, 장이 마련되고 창조해야 한다. 가정이면 가정, 굉장히 유동성이 많은 사회단위지만, 그 사회단위는 개인의 성격에도 이미 사회단위가 있을 수 있다. 어떤 행태든 우리에게 있다. 오늘의 시대에서 발견한 내용이 있다면, 여러분이 함께 모인다, 여러분이 주체가 되어 여러 가지 원인과 관련해서 모든 제어의 성격을 넘어서서 이곳에 오기까지 독특한 생의 결단이든지 현장들이 있다. 그런 내용을 쉽게 말하면, 하나의 가제가 살기 위해 터전을 두고 있는 장소에 하나의 공간이 있을 수 있다. 그 공간이 critical space라 할 수 있다. 활동영역에서 뭔가 될만한 생활공간을 확보하기 위해서 늘 자기 생의 공간을 두는 것이 있는데, 같은 종끼리 충돌되는 영역이 있는데 그것이 경계가 될 것이다. 이는 모든 동물에게 있는 것인데, 이를 비판공간, 생활공간이라 할 수 있다. 이런 것은 동물에게 뿐 아니라 우리의 인식에도 그런 공간이 있다. 어린이가 자라면 대개 2∼3살 사이에 그런 공간이 형성된다. 대상에 대해 대상으로 인식할 때, 마치 자아가 있어서 내 안에서 밖을 보는 형태를 넘어서, 생활에서 경계해야 될 그런 형태에 대해서 대상을 독특하게 인식하는 단계가 있다. 그때 사람은 처음 인식하게 된다. 남을 남으로, 나는 나로 인식하고 미워하고 사랑하고 배제하는 공간이 형성된다. 사람의 경우, 시간이 짧다는 것 뿐. 성장이 제한된 동물의 경우 더 짧을 수 있다. 이와 관련해서 여러 가지 의학적, 과학적 설명을 할 때, 세포단위 하나까지 간다. 세포하나에도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머리카락부터 발바닥에 이르기 까지 세포로 구성되어 있는데, 세포는 각각 자신의 critic 공간을 가지고 있다. 이를 사회적으로 이해하듯이 그런 것도 사회적으로 이해하게 되어 있다. 그만큼 신비한 영역이다. 살아있는 생명체의 경우만 그런 공간이 있고 사회적이다. 이렇게 알려져 있었던 것이라면 좀더 깊이 들어가면 소립자의 세계에 들어갔을 경우에도, 그것은 사회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때 문제는 색깔. 이는 빛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근원적으로는 훨씬 작은 입자 속의 특징으로 되어 있다. 색깔은 좀더 복합적인 문제이지만. 우리의 잘못된 점을 이것을 통해 생각해 보자. 컴퓨터 모니터든 비디오에서 모니터로 가든, 기본색이 무엇인가? 빨강 파랑 노랑. 과연 이것이 기본적인 색인가? 사람에게는 그 세가지 가지고 세상을 덮어도 전혀 모순을 못 느낀다. 자연 자체는 세가지로 종합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사람과 자연의 근본적인 차이. 이것이 판명성의 오류이다. 우리는 이러한 오류를 가지고 있다. 인간은 복잡한 세계를 축약시켜 세가지로 만들어서 그것을 다시 무한데로 학대해서만 인식하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이것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판명성의 오류이다. 1초에 몇 번 움직이면 정지된 것이 움직이는 것으로 보이는가? 24번. 그러나 사과와 사과그림은 어느것이 인간에게 가까운가? 그림을 더 좋아한다. 어린이를 보면 알 수 있다. 어린이는 복잡한 색깔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단색을 좋아하고 인식한다. 복잡한 것은 전혀 관심도 없다. 아주 빨간색이든, 파란색이든 그런 것을 통해서 인식한다. 자라면서 이것이 익숙해서 환원적 성격에서 혼돈으로 바뀌었다. 예술가들이 색을 잘 가리고, 여성은 색을 잘 가린다. 그랬을 때, 그런 놀이. 판명성의 오류에서 놀이로 발전한다. 인간의 놀이가 성숙하게 되면, 어린이의 인식을 넘어서면, 아름답고 조화로운 색을 창조하게 된다. 그런 인간에 대해서 하나님이 과연 어떤 말씀으로, 자신을 알리신다면 어떤 문제가 있겠는가? 하나님께서 우리와 같은 사람이 되어 우리 곁에 있으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맞는 말이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다. 과연 인간이 하나님을 알 수 있을까? 다양한 한계 속에 있는 인간에게 다가오실 때, 어떻게 인간 자신에 대해 설명하고 하나님 자신에 대해서 설명하실 것인가? 이것이 교육과 관련된 것이다. 교육이라는 것은 인간의 판명성이라는 오류를 정확히 알고 그 오류 속에 있는 인간에게 가까이 가는 형태로서의 교육이 방식과 내용으로 있는 것이다. 그림을 그리는 형태에서, 유클리드 기하학, 복잡한 형태로 꼬이는 발전이 있다. 이것은 자연에도 없는 것이고 인간이 만든 산물이다. 그 놀이 속에 인간이 들어가게 해야 한다. 이것이 도시문화, 그 문화 속에 파묻혀 있고 그 기능 속에, 놀이문화 속에 익숙해야 한다. 이런 문제를 놀이로 비약해 본 것이다. 시계가 전혀 놀이의 성격 속에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익숙해 있다. 해가 뜨면 일어나고 해가 지면 자고. 우리가 만든 문화는 시계문화이다. 하나님께서 만든 문화는 해가 뜨면 일어나고, 지면 자는 것이다. 그것은 비유다. 이것이 굉장히 어려운 문제이다. 성경이 말하는 것은 이런 것이다. 성경이 가르침의 방향은 창조는 비유라는 것이다. 그 비유에 기초해서 다음에 진리의 내용을 펴 내고 있다. 성경은 굉장히 어려우면서 가까이 있다. 본문을 다시 보면, 세 가지를 말한다. 첨예한 해결의 장이 있는데, 그런 오류 속에 있는 사람이 가득한데 얼마나 많은 문제가 있겠는가? 그러나 그 자체가 근원적인 오류 속에 있는 놀이문화라고 할 수 있다. 놀이문화는 real한 비유를 사용한 것이다. 가정 같으면 집이 있어야 한다. 다른 많은 것이 필요로 한다. 대충 사회의 핵심을 보면, 복잡한 거대사회로 가면, 건물도 아니다. 사람이 가장 중요한 문제이다. 실제적으로 사람이 필요하다. 사람이 어디에나 있는 것인데, 어떤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 된다.


무엇보다 더 우선 믿을만한 사람이 많이 있어야 한다. 중간에 보면, 그것과 함께 능력이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셋째는 진리를 늘 추구하고 그 진리를 위해서 순교하기까지 희생하는 사람이 필요하다. 이 세 번째가 기독교와 관련된다. 세상에서는 전혀 가치가 나타나지도 않고 창조해야 될 가치, 세상에서는 전혀 유사성이 없고 기대하지도 않고 그렇지만 그것을 만들어야 이 세상이 존재하는 틀이 형성된다. 소돔과 고모라에서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것은 바로 사람이다. 하나님을 찾는 인간. 그 사람이 없기 때문에 소돔과 고모라는 멸망했다. 소돔과 고모라에 있는 성의 인물들은 그 가치를 인식도, 능력도 없다. 성경에서 말하는 가치는 그것을 열 사람이 있어야 한다. 교회가 갖는 고뇌의 가장 근본적인 성격이다. 믿을만한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공부를 잘하고, 똑똑하다는 말은 아니다. 그런 것은 공동사회에서 평범한 같은 또래문화에서 또래 교육내용에서 다수가 있을 때 하나가 두각을 나타내는 성격에서만 그것이 기준이 되어서 똑똑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계층을 넘어서 큰 사회로 갈수록 그런 내용을 가지고는 사회가 위험할 수 있는 것이다. 교회, 회사가 될 수도 있다. 거대사회로 갈수록 믿을만한 사람을 필요로 한다. 그 사람이 결여되었을 때 사회와 문명이 파괴된다. 한국사회에 있어서 왜 장관들이 많이 바뀌는가? 인물이 없다는 것을 말한다. 대통령이 나와도 인물이 없기 때문에 득표가 낮다. 과연 믿을만한 사람의 기준과 내용은 무엇인가? 미국사회 같으면 부시가 믿을만한가?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이다. 가장 기초적으로는 최우선으로 가정을 넘어 한 사회를 구성되었을 때, 집열쇠를 맡길 수 있는 사람. 회사의 금고를 맡길 사람이 없다. 그만큼 믿을 사람이 없다. 교회라 했을 때, 금고와 열쇠를 누구에게나 맡길 수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할 경우, 강퍅하고 매마른 단체와 사회가 될 것이다. 신뢰를 단위로 움직이지 않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사회에서 가장 근본적인 요구는 여기에 가깝다. 아무리 똑똑해도 신뢰를 잃으면 소용이 없다. 이것이 같는 부가가치를 생각해야 된다. 한 사람이 아니라, 전체가 그러하다고 했을 때, 전체 경제적 부가가치의 성격이 어떻게 확대될 것인가? 이것을 계산하지 않고 교육을 해 봤자 소용이 없다. 한국교육이 제로다 라는 것은 이것이 가장 문제이다. 초등교육의 핵심은 이것을 기르는 것이다. 국민 한 사람의 부가가치를 가장 극대화시키는 것을 해야 그 다음에 지식이 있다. 그러나 이것이 전무하다. 이 문제는 현대사회 뿐 아니라, 한국의 경우 누가 책임을 질 사람이 없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초인이 되어야 한다. 전혀 엉뚱한 생각 속에서 살고 행해야 한다. 이러한 문제의 심각성을 알기 때문에 더욱 그러해야 한다. 정직, 성실, 신실, 근면, 부지런함. 이런 많은 자질은 다른 무엇을 공부하기 전에 가정에서 놓쳤다면 사회에서 해결해야 한다. 이는 사회가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러나 한계를 넘어섰다. 미래 이런 부가가치를 생각해서 경제가치, 교육, 사회, 모든 분야에서 이를 가미해서 계산해 보면, 미래사회의 치명적인 재난은 대개 거기에 있을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인재라는 말도 그런 뜻이다. 이런 문제와 관련해서 교회의 사명은 어떤 것인지 알게 된다.


이를 넘어서서 공교육이 갖는 국민교육의 사명은 크다. 초등학교 교사의 책임은 크다. 어떤 아이가 전혀 측정되지 않은 학생인 경우, 교사가 맡았을 때 훌륭한 인물로 만들어 내야 한다. 엄마가 되고 아버지가 되어야 한다. 1, 2년 지나면 완전히 바뀌어야 한다. 그 다음에 문제는, 믿을만한 사람이 70%로 확대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되었을 때 바보가 되는 것이 아닌가? 모두가 순진해서. 이 때 히틀러 같은 인물이 나오면 싹쓸어 간다. 1%일지라도 파괴력은 크다. 막을 길이 없다.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그래서 도덕적 능력, 예리하게 사회를 보고 사람을 직관하고 진단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자가 필요하다. 이것이 현대사회를 움직이는 기둥이다. 고등교육은 이런 능력 배양에 있다. 가장 신뢰받는 직종, 환경미화원, 성직자는 나중이고, 정치가는 더 낮고. 깡통을 남이 보지 않는다고 어떤 곳에 끼워 두는 것을 볼 때, 한국사회의 인적 자원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인도에 신호등이 있다면, 운전자는 신호등에 의해 제어되어야 하는데, 무시하면 어린이가 따라 한다. 그때는 어른이 모범을 보여야 한다. 아무리 차가 없고 사람이 없더라도 기다려야 한다. 그러나 시민정신을 요구하기 전에 선행되는 것이 바로 능력의 문제이다. 교통신호체계에 대한 잘못을 지적하는 복합사회의 능력문제가 있다. 시민정신을 요구하기 전에 더 요청되는 능력문제이다. 과거에는 시민정신을 요구하기 전에 잘못이 너무 많아서 드러나지 않았다. 지금은 그 잘못을 인식하고 시민정신을 요구하는데, 그 전에 잘못을 많이 지적하게 된다. 그래서 단순히 믿을만한 사람 뿐 아니라 능력있는 사람을 요구하게 된다.


지금까지는 저축이 미덕이라 생각했으나, 자본주의 시대에는 패망의 원인이라는 것은 상당수준의 인식이다. 은행 이자율이 대단히 낮아 졌다는 것은 자금이 계속 흘러갈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사회의 유통구조가 갖는 능력의 문제라 할 수 있다. 돈의 가치라는 것을 좀더 알게 된다. 그 전에는 신화적인 방식, 하나님께서 이것은 가치가 없다고 하여, 헌 신짝처럼 헌신하여 헌금도 하여 도움을 주고 있으나, 지금은 거런 것이 아니다. 경제구조 자체에 의해서 쓸데 없는 휴지종이가 되어야 돈의 본질에 가깝다는 좋은 사회로의 징조가 된다. 돈은 가치를 가늠하는 이정표 역할만 하면 된다. 유통하는 동안만 가치를 창조하고 계속 폐기되어야 한다. 돈이 정지되어 있지 않고 인재를 양성하고 돈은 사라진다. 그래서 사람이 중요하다. 사람을 중심으로 돈이 사용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무슨 가치로 쓰여져야 하는가? 이런 문제가 가치문제로 등장한다. 현대 사회에서는 돈 외에 아이디어가 가장 가치 있다. 아이디어는 굉장히 큰 부가가치이다. 지적 기반 사회라 했을 때는 어떻게 세계적인 아이디어를 내서 팔 것인가? 예술도 문화도 중요하지 않다. 그 문화와 예술 속에서 어떤 부가가치를 창출할 것인가가 중요하다. 배우도 중요하지 않고 창출된 가치만 중요하다. 창조적 아이디어. 대학까지 가서 배우는 것은 다른 사람이 다 써먹은 아이디어이다. 수학을 끝까지 100점 맞어도 아무 소용이 없다. 수능 100점을 맞아도 소용이 없다. 새로운 아이디어, 과거에 전혀 없었던 것만 그 사회의 부가가치가 된다. 상을 준다. 한국사회가 점점 독립되어 갈 때 아이디어에 집중해야 한다. 한국에서 새로운 아이디어가 있겠는가? 과학자 소립자를 연구한다면, 전혀 다르게 역사공부를 해야 한다. 어느 순간의 직관이 연결된 직관이 될지 아무도 모른다. 자연과학, 인물과학이 분리되어야 한다는 문제에 사회가 갈등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심각한 문제이다. 같은 색을 볼지라도 과거와 같은 방식으로 본다면, 아이디어를 얻을 수 없다.


거대사회의 방향과 관련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세 번째이다. 진리문제. 무엇이 진리인가가 중요하다. 최소한대로 교회든, 사회든, 소수의 희생자가 방향을 결정하고 그 요소 때문에 사회가 우회하는 경우가 있다. 그 사회 전체가 하나로 흘러 가는데, 그 점정이 저항을 받아 한 사람 때문에 방향이 바뀐다. 실제적으로는 사회 전체의 비판과 장애와 방해가 되고 더 이상 있어야 될 존재가 아닌데, 그것이 방향을 결정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이 진리문제이다. 진리는 한 사회의 방해로 인식될 때가 있다. 그 사회가 어디를 향해 갈지. 이것이 교회와 직결된 문제이다. 사회가 전혀 줄 수도 인식도 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학자의 문제요, 정치가의 문제이다. 이것이 교회가 드러내야 할 진리이다. 교회가 타락하는 경우는, 진리의 가치를 알고 보존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맴버나 사회의 구성원이 같기 때문에, 문만 왔다갔다, 시간과 약속이 다를 뿐이지 전혀 다를 것이 없다. 조금 차이가 있다면, 여기 모인 사람들은, 그나마 사회와 시대에 역행하는 것에 약간의 안식을 누리고 머물러 있다. 진리의 문제다. 성경은 이 진리의 문제를 가지고 있다. 이 방향과 관련된다.


창조 자체는 너희에게 복으로 거저 준 것이다. 이것이 중요하다. 너가 그것을 가지고 장사하거나 소유해서 내용으로 삼도록 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거저 주었다. 이것이 갖는 생의 기초라는 것은 굉장히 크다. 우리가 생각한 가치를 가지고 하나님을 평가하는 것이 판명성의 오류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는 것들은, 우리가 가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 도저히 그 가치를 측정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을 인간으로 알게 하는 것이 창조의 기록이다. 그렇게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자기 길을 가는 사람으로서 평생 자기도 모르고 간다. 이것이 죄와 양심과 두려움, 숨는 일 모든 것이 관련되고 얽혀 있다. 집, 화장실, 경계를 세우는 것, 도로를 만드는 것 모든 것이 이런 것들과 관련되어 있다. 이것이 죄다. 이것이 방향이다. 창조가 무엇인가? 그 위에 너가 저지르는 내용이 무엇인가? 그러면서 하지 말라는 것이다. 피조물을 나와 혼돈하지 말라. 너를 주신 자와 혼돈하지 말라. 거기에 한 method가 부모를 공경하라. 십계명. 결국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 그런 문제를 들쳐 내고 들쳐 내서 하나님께서 만든 공간이 조금 생기니까, 그것을 조금씩 집어 넣어 준 것이 성경이다. 인간은 얼마나 악한지, 하나님께서 홍해를 갈라서 이적을 행하여 무엇이 진리인지 알게 하셨는데, 진리는 버리고 홍해 갈라진 것만 나에게 있었으면 하는 것이 인간의 어리석은 가치인식이다. 늘 처음 행위대로 어둡다. 하나님은 아니다. 이렇게 해야 너의 가치다. 나와 관계하고 나로부터 참으로 갖는 복의 내용이 바로 너의 복이고 최고의 선물이다. 세상의 진리문제는 합리적 이성에 의해서 창출되는 부가가치의 내용이 되는 창조적 아이디어와 물품이지만, 더 나아가서는 진리의 문제가 있다. 진리 자체를 파괴하는 또다른 진리, 이렇게까지 주장하는 합리적 이성. 처음부터 가인시대부터 죄의 소원이 있다. 그것을 다스려라. 노아의 홍수 이후에도 항상 오직 악할 뿐이라 하였다. 사실에 대한 정확한 진단을 하고 나서 그것을 점점 깨닫게 하는 수단을 확대하여 이것이 율법의 내용이 되었다. 네 복이 무엇인가를 마지막 내용으로 '내가 너의 상급이요 선물이다, 참된 복은 내가 네 하나님이 되는 것이다'. 이런 창조와는 다른 독특한 창조 이후에 진행되는 내용과 관련해서 엉켜 있는 진리의 문제. 이것이 근원적인 진리의 문제이다. 우리가 궁극적으로 제시하는 것은, 그런 진리를 위해 추구하고 순교하고 희생할 사람이 있느냐? 그래서 교회는 궁극적으로 이런 문제를 안고 교육의 초점이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많은 유혹이 있었다. 성경의 기록만큼 많다. 성경의 기록은 전부 실패의 내용이다. 칭찬이 없다. 실패의 내용을 보고 인간이 어떻게 오염이 되고 다른 길로 갈 수 있는가? 보물을, 진주를 돼지에게 던지는 것과 같다. 그 진리를 감당할 수도 없고, 인식할 수 없고 버려 왔다. 하나님을 멸시하였다. 매와 막대기로 그 진리를 심었다. 그 진리는 종결되어도 교회는 계속 타락하였다는 것이 교회사이다. 완전주의, 신인협동설 등 많은 문제가 있다. 하나님에 대해 어떤 지식을 가져야 하고, 구원의 내용은 무엇이고,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고 그 뿌리는 얼마나 깊은 것인지를 가르치고 그 가치를 보존하기 위해 몸부림쳐야 한다. 이런 개혁교회는 종종 시대에 없을 때가 많았다. 간헐적이다. 교육은 어려운 것이다. 한 사람, 두사람만 나와도 굉장한 것이다. 그 한 두 사람으로 시대는 변화된다.


어디에 내놔도 빈틈이 없고 어느 곳에서도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함도 타협도 없는 사람을 만들어야 한다. 기독교 교육은 여기에 목적이 있다. 이런 하나님의 역사는 환란의 떡과 고생의 물이라 한다. 떡은 창조물이다. 일상생활의 가치이다. 그것을 비유로 삼고 실제 비유될 내용은 환란이다. 그것도 떡이다. 지옥도, 앗수르, 바벨론, 죄와 지옥도 수단이다. 이는 무엇을 가르키는가? 이것이 중요하다. 환란의 떡과 고생의 물을 주시나, 그것을 비유로 주셨으나 그것도 주셨다. 역사가 스승이다. 하나님의 역사 자체가 스승이다. 판명성의 오류로 들어온 것은 아니다. 여러분과 역사 현장 자체가 스승이다. 이스라엘은 이를 형성하는 바탕이다. 요셉에서 다윗에서 약간 분리되었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역사의 가장 정직하고 객관적인 진리는 우리 자신이다. 우리가 아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다. 그것은 서곡에 불과하다. 모든 역사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서곡에 불과하다. 자랑할 것도, 실망할 것도 없다.



개혁교회의 교회교육Ⅱ: 방식에 대한 제안적 설명


말씀: 디모데전서 1장 5∼7절, 경계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 나는 사랑이거늘 사람들이 이에서 벗어나 헛된 말에 빠져 율법의 선생이 되려 하나 자기의 말하는 것이나 자기의 확증하는 것도 깨닫지 못하는도다


앞서 우리가 소개한 개혁교회 교회교육의 의미와 필요성에 따라서 두 가지 결론이 나온다. 첫째로 하나님의 모든 역사 자체가 교육의 내용과 수단이라는 사실이다. 둘째로 그런 근원적 성격에 따라서 교육방식은 다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느 것을 일방적으로 좋다 나쁘다고 말하기 곤란하다. 그러나 최종적 교육목적은 인간의 구원목적과 같아야 가장 이상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첫째로 모든 교육은 가정에서부터 시작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가정 자체가 이미 교회라는 사실이다. 아마 처음부터 교회로서 시작한 가정이 가장 이상적이다. 가정교육은 그런 근원에 따라 이루어져야 한다.


둘째로 인성교육을 포함한 모든 교육에 있어서 낙오자가 없어야 한다. 교육에 있어서 낙오자가 많이 생기면 생길수록 미래사회는 그보다 더 많은 대가를 치러야 하기 때문이다. 현대사회가 점점 더 각자에게 고도의 능력과 기능을 요구하지만, 가정은 핵가족으로 굳어져 가면 갈수록 국가전체의 입장에서 이런 이념이 필연적으로 요구된다. 각 개인이 나라의 전체 역량을 위해서 고급인력으로 만들어 내양 한다. 경쟁해서 자르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을 첨단인물로 만들어 가야 한다. 지금 교육자의 책임이다. 잘 하는가 보자가 아니다.


셋째로 창조력을 위해서 기초재능에 따라 모든 분야에 교육이 확대되어야 하고 언제든지 교육방식은 통합교육의 방식이어야 한다. 현대사회에서 필요로 하는 창조력과 상상력은 지식의 획일성에서 나오지 않고 지식의 통합성에서 나온다고 볼 수 있다. 현대사회에서 요구되는 창조적 직관은 예측할 수 없는 분야에서 영감을 받을 수 있다.


넷째로 첨단과학 및 그 기술일수록 가능한 한 빨리 공적으로 개방되어야 하고 한 개인의 기초능력이 확인되면, 가능한 한 개방된 지적 내용에 따라 조기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것은 기업문화와 관련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지적재산권, 특허권 등 개인 사유적 권리는 보장받으면서도 지적산출물들은 항상 패쇄적인 것으로 남아 있기보다는 공유적인 것으로 발전될 때, 오히려 그런 지적 산출물들은 기하급수적으로 인류에게 공헌한다고 볼 수 있다. 대부분 나쁜 지적 산출물들은 빨리 개방되지만, 인류에게 공유해야 할 지적 산출물은 오히려 폐쇄적으로 감추어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선별적 첨단과학 및 기술정보에 대한 조기교육의 필연성에서 현대시대의 정보의 양을 고려해야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수학에 대한 교육내용은 일부 지적 능력이나 계산능력을 요하는 것은 전부 컴퓨터나 계산기로 다 처리하고 근원적 창조적 직관만을 배우는 과정으로 줄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다섯째로 누구에게나 무제한적으로 그리고 평생을 통하여 교육의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 이런 평생교육은 인구의 고령화 때문에 요청된 것만은 아니다. 현대 지적기반사회에서 필연적으로 따르는 인적자원이나 지적활동의 빠른 전환속도 때문에 평생교육이 필요로 한다.


여기에서 중요한 전제는 민족문화는 점점 쇠퇴해 갈 것이라는 점이다. 모든 사회와 문화의 지적 저변을 이루는 지식의 축적의 내용이 점점 더 비가역적으로 빨리 축적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고려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순수한 민족문화는 거의 불가능하고 현대사회에서 거의 의미가 없어져 간다는 점이다. 거기에서 과학이나 문명에 있어서 비가역적 사실들이 점점 축적되고 있는 속도를 생각하게 된다. 문명과 문화가 세계화해야 된다는 것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세계화된다는 것이다.


상기의 내용들은 교회가 현대사회의 발전을 위해서 무엇을 준비해야 할 것인지를 암시해 주고 있다. 교회는 그 가치의 내용 때문에 미래사회를 위해 독보적 위치를 점유하고 있다. 미래에 대한 이념이나 실제적 역사의 핵심에서나 모두 그렇다.


유치원에서 기초교육 이전 단계에 있어서 재능을 발견하는 길


1. 창조력을 관찰하기 위해서 마음대로 그림을 그려보도록 한다. 그 그림들을 각각 분석하여 개인의 미래를 예측하고 교육의 내용과 방식이 결정되어야 한다. 거기에서 그런 시험이 모든 것일 수 있다. 국가나 교육자에게 부여된 과제만 있을 뿐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의 특성들을 파악하여 각각의 방식대로 가장 고급한 인력을 만들어 가야 할 과제만 남아 있다.


2. 대상에 대한 행동방식과 그로 더불어 나타나는 도덕성의 발현내용을 집요하게 객관적으로 관찰하라.


직관교육과 언어교육

통합교육을 위해 교육기회들의 확대방식



하나님의 역사 자체가 교육의 내용이요 방식이다. 하나님의 가치의 다른 것이 그것을 비유로 그런 내용에 해당되는 것이 죄, 고난, 다른 관계 속에서는 정치체제든지, 죽음이든지 다 수단으로 되어 있다. 교육방식이라는 것은 그 안에 포함이 되는 것이다. 내용과 방식을 구분하기는 학문적으로도 어려운 것이다. 방법 자체가 실제 사실을 창조하고 있다. 관찰자가 적은 입자를 관찰할 때는 그 입자의 크기나 관찰된 대상의 입자가 같고 했을 때는 확률에 의해서 다른 것에 의해서 관찰된 것이기 때문에 객관적이지 않다. 현미경과 대상과 구분이 되지 않는다. 방법 자체가 실체를 창조하는 그런 성격이 있다. 이는 물리적인 현상을 넘어 정신적인 현상에는 더욱 그러하다. 기구성 했을 때는 how에 대한 것. 기구를 사용해서 문제를 해결했다는 것. 극단의 상황은 관찰하는 기구와 대상이 구분되지 않는 것이다. 첨단과학 기술분야는 나노의 세계에 대한 것이다. 원자단위를 조작할 수 있는 테크닉. 이런 의미가 강하다. AFM, STM 같은 장비를 통해 분자, 원자를 표면에서 떼어냈다 다시 붙였다 할 수 있다. 그 전에는 원자 자체를 관찰하는 것도 어려웠다. 조건이 있다면, 떼어내고 붙일 때, 분자 자체가 스핀이든 굉장히 속도가 큰데, 이를 정지할 필요가 있다. 그 수단은 절대온도로 내리는 것이다. 그 상태에서 어느정도 정지가 가능하다. 절대온도 4K. -273도. 분자가 바뀌면 냄새가 달라진다. 이런 입자를 제거하면, 산소와 질소를 제거하고 진공상태로 만들고 그 때 필요한 산소의 원소가 존재하도록 하는 작업은 굉장히 어렵다. 어떤 면에서 과거의 냄새분자가 어떤 형태나 각도로 바뀌면 냄새가 제거된다. 응용분야로 발전된 형태이다. 도구성이 갖는 방법과 대상이 구별될 수 없게 되었다. 더 큰 문제는 입자의 속도 외에도, DNA의 경우, 상온을 유지해야 하는데 그런 것은 대단히 어려운 내용이다. DNA에 형광물질을 붙여서 분자의 이동을 관찰할 수 있는 것이 최근 의학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부분이다. 독일, 하이델베르그 등에서 이런 작업이 이루어진다. 바이러스가 세포에 접근할 때, 바이러스의 유전인자가 거기에 분자를 조작해서 형광물질로 대체해서 바이러스의 침투과정을 안다. 이것이 메트릭스이다. 이것을 발견해서 바이러스의 근본적인 성향을 발견하는 것이 중요한 순수학문이 되고 있다. 최근 보고에 의하면, 바이러스가 세포의 표면을 움직일 때, 굉장히 복잡하게 사회적 활동을 보였다. 원숭이가 어떤 집을 침투하기 위해서 굉장히 다양한 길을 통해 복잡하게 어떤 통로를 거쳐서 결과한다는 것이 밝혀 졌다. 어떤 방법과 대상과 분리하는 일은 첨단과학으로 깊어 져야 가능해질 정도로 쉬운 일이 아니다. 정신과학은 더욱 어렵다. 후설의 경우, 인간의 가장 큰 실수는 정의를 생각할 때, 경험적인 것과 사전적 의미로 언어의 그릇에 담겨 있는 것처럼 파괴하였다는 것이다. 모든 학문에서 대상을 관찰할 때, 방법 자체를 찾는 것이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사고 자체가 굉장히 문제가 된다는 것을 제시할 수 있다. 그런 문제가 되는 것을 제시할 때, 대부분의 사고패턴이 교수하든 가르치든 모든 체계가 이루어진 지식체계 기반을 무너지게 하는 획기적인 내용이 된다.


이런 문제와 관련해서 하나의 구축이 되어 있는 사상을 무너뜨리는 것이 굉장히 어려운 것은 긴 시대를 통해 깊게 뿌리를 내렸기 때문이다. 기술과학과 관련해서 어려움에 부딛혀서 기술혁명을 일으키고 있는데, 정신과학에서는 그런 것들이 더욱 어려워 진다. 기술과학에서 생각했던, 과거에는 대상으로 생각지 않았던 내용이 기술과학의 대상이 됨으로 말미암아 더 심도 있게 박혀 지는 그런 내용이 많다. 대표적으로 지향의 개념, 의식이 한 방향을 갖는다는 것. 단순히 철학적 대상이었으나 자연과학의 대상이 되었다. 의학에서도 그것이 무엇인가 문제를 제기함. 장수 유전인자가 발견되었다는 것. 과거에도 수없이 언급된 문제이다. 서울대에서도. 자기의 학문영역에서 많은 보고서가 있다. 게놈 프로젝트에서도 발견된 것이지만, 유전인자도 인간의 복합적인 어떤 정신적 작업에 의해서 형성되고, 그 인자를 각각 분리해서 다룰 수 없고 네트워크에 의해서 알 수 있다. 장수 인자가 발견되었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고 전체적인 네트워크가 밝혀져야 응용효과를 낼 수 있다. 나이는 생명의 연장, 정신의 연장으로 대단한 발견이다. 감정은 어떻게 나타나게 되는가? 지향성 개념은 많이 밝혀 졌다. 크릭, 의지 자체도 DNA라고 생각하였다. 현대는 잘못으로 밝혀짐. 자신의 내면을 관찰해서 그것이 무엇이다라고 밝혀졌으나 이것이 자연과학의 대상이 되어, 자연과학의 설명에 의해서 진행되고 있는 실정이다. 인문과학의 자리가 없어진다. 이제는 자연과학과 인문과학을 구분하는 자체가 고전적인 방식이 되었다. 통합적인 방식으로 흐르고 있다.


방법과 대상이 구별되지 않는 것과, 상식이 첨단으로 된 것을 고려할 때, 과학적 사실이든, 역사적 사실이든 더 이상 뒤로 갈 수 없는 축적의 성격이 있다. 민족문화를 강조해도 촛불로 돌아갈 수 없다. 에디슨이 등을 발견했어도, 생활에 응용된 것은 유럽, 스위스에서 시작되었다. 에디슨의 발견에는 수많은 인자들이 선행되었다. 과거에는 정전기 현상을 전기라 하였다. 그러나 전자기력이었다. 자연과 전기를 교환할 수 있는 정도로 발전되었다. 더 이상 부정하거나 포기할 수 없고 없앨 수 없는 것. 지금은 속도가 굉장히 빠르다. 세계문화가 비가역적 사실에 의해서 단일화되어 가고 있다. 이러한 것을 고려한 교육이 있어야 한다. 그렇다고 오늘날과 같이 유동성이 있는 것에 근거해서 교회교육이 이루어져서는 안된다. 그러나 비가역적 사실을 배제한 교회교육은 어렵게 되었다. 창조의 비밀이 감추어진 것이 모든 역사를 통해 점진적으로 밝혀지고 있다는 내용이다. 인간의 오류는 판명성의 오류에 다 걸린다. 인간이 혼돈하게 되면 더 이상 발전할 수 없다. 어느 적정선에서 멈추어질 것인가를 고려해야 한다. 아무리 핏줄로 로봇이 만들어져도 인간의 한계와 만나야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것을 넘어서면 의미가 없어진다. 이런 것과 다 연관된 제안들이 여섯가지 제안적 설명이 된다.


기초교육에 들어가기 전에 재능을 발견해야 한다. 이것은 가정에서 이루어진다. 디모데전서에서 설명하듯이 자라는 세대에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이다. 이것을 배제하고 어떤 교육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어린이의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은 지식도 아니고, 얼마나 풍부하냐도 아니고 그 인품에서 나오는 사랑이다. 그런 사람에게서 교육적 효과를 나타내게 된다. 그곳은 바로 가정이다. 사회적 조건에 의해서 가정이 파괴될 때, 사회가 책임을 져야 하는데 지금은 그 수위를 넘어섰다. 이제 교회가 담당해야 한다. 사랑은 상대방이 필요로 하는 것을 줄 수 있는 능력이다. 그 사람에게만 가면 모든 것이 흡수된다. 아무리 악하고 짓꿎어도 그 선생님 앞에서는 모든 것이 차별이 없어지는 것이 바로 참된 교육자의 모습이다. 교육자는 청결한 마음, 선한 양심, 거짓없는 믿음에서 나는 사랑이 있어야 한다. 어린이가 미래 사회를 위해 무엇을 공헌할 수 있는 가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아이에게 규정된 것을 집어넣는 것이 교육이 아니다. 그 아이가 어떤 상태이고 어떤 내용이 필요하고 어떤 방식을 따라야 할 지를 발견하는 것이 참된 교육자의 역할이다. 외국의 경우, 개인의 재능을 빨리 발견하고, 그것을 적극 개발한다. 공교육이 일대일 관계를 가진다. 부모가 자녀에 대한 관계가 선생에게서 확인되고 부모의 모든 교육적 역할을 선생이 담당할 수 있는 조건이 형성된다. 자녀에 대한 정확한 진단이 필요한데 긴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 중고대학 교육의 존재이유인 것이다. 선생은 가르치는 것에 앞서 그림 한 장을 보고서도 아이의 내면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교사의 자질은 발견에 있다. 교수가 전문가가 유치원으로 가야 한다. 손가락 움직임으로 한 아이의 가능성을 발견하는 것이 중요하다. 모든 사람이 사회에서 역할을 할 수 있다. 학교교육에 한 사람도 제외될 수 없다. 모두가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이 낙오자가 없다는 것, 정확한 재능을 발견하여 사회의 가치를 극대화하는 인물로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낙오자를 없애는 방법이다.


수학교육은 계산기와 컴퓨터가 할 수 없는 것만 공부한다. 유클리드 기하학은 가르칠 필요가 없다. 이로 볼 때, 조기교육의 의미는 전혀 다른 것이다. 조기에 정확한 재능을 발견하여 그것이 극대화되어 사회에 공헌할 수 있도록 방향을 지도하는 것이 조기교육의 핵심이다. 직관적 언어교육, 무언의 지식이 확대될 것이다. 동물은 인간보다 훨씬 복잡하게 언어 없이 기능한다. 언어를 사용하면 벌써 타락한다. 방향이 결정되고 고집이 생기고 주장이 강해진다. 레비스트라우스, 직접직관을 사용. 원시인간이나 문명에 가깝지 않은 사람일수록 직관이 발달된다. 풀을 보기만 해도 그것을 먹을 것인지 못 먹을 것인지를 안다. 하나를 한번도 똑같이 그리는 법이 없는 사람이 있다. 한번도 자기 글씨, 자기 방식이 없는 사람은 직관이 창조력이 풍부한 사람이다. 한번도 제길로 가지 않은 사람이다(폭소). 한번도 수학공식을 따라 푸는 법이 없는 사람도 무시되어서는 안된다. 이러한 성향이 극대화되었을 때, 굉장한 위력을 나타낸다.


통합교육의 확대. 단계가 사람을 구분해서는 안된다. 어린 아이가 대학강의를 들을 수 있도록 열어놔야 한다. 외국의 경우, 교과내용이 실제 사실로서 확인된다는 것이다. 교과서로는 들을 수 없는 강의지만, 실제 사실로 확인되는 강의는 어린이도 대학생과 동일한 인식능력을 발휘한다. 시험하고 보고 관찰하고 결과를 내는 자질의 경우 나이의 차별이 없다. 이런 영역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내용이다. 초등, 중등, 고등, 대학교육이 통합적인 과정으로 구성될 필요가 있다. 통합적이라 했을 때는 다전공을 말한다. 이는 직업이 자유롭게 변화되는 현상의 기반이 된다.


질문.

Q1. 방법과 실제가 구분되지 않는다.

→ 자연과학의 경우 방법과 실제가 잘 구분되지 않는데, 인문과학은 더 그러하다. 사전을 볼 때, 단어의 뜻이 획일화되어 있다. agree와 동의하다는 말은 같이 할 수 없다. 다른 언어로 번역해도 마찬가지다. 언어의 family라는 것이다. 시험은 단순히 암기하여 정답에 동의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는 문제가 심각한 것이다.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는 창조적 아이디어를 크리틱할 더 강한 객관을 발굴하는 것이 그 시대의 사명이 된다. 사전을 외우는 것은 헛된 일이다. 100점을 맞아도 무의미하다. 창조성은 다 빼앗긴다. 언어 자체를 볼 때, 게임논리로 되어 있다. 표상의 성격은 있다. 문화의 발전에 따라 언어의 표상도 바뀐다. 한번 사용된 언어의 의미를 다른 시대에 전혀 의미가 없어지는데 계속 사용한다. 16세기의 의미는 누구의 어떤 작품에서의 의미라고 말해야 한다. 그 역사시대의 표상방식에 의해서 그 의미를 그 시대에 고정시켜야 한다. 지금까지 사전의 의미는 전혀 의미가 없어진다. 초등학교에서 할 일을 대학에서 논문으로 결론짓는다는 것은 대단한 비극이다.


Q2. 메트릭스의 뜻과 청년부의 대화식 성경공부가 갖는 문제와 개선점.

비루스가 갖는 길의 혼돈의 성격을 수학화하는 것은 어려운 것이다. 그룹토의와 관련해서 장점과 성격은 많이 검증된 것이다. 대화는 헬라시대부터 검증되어, 변증법이 진리를 발견하는 수단으로 사용되는데, 플라토가 소크라테스의 방법론에 대해 설명할 때, 사람은 선천적으로 이데아의 세계가 있는데, 이테강을 건너 망각하여 대화를 통해 망각을 기억해 낸다는 것이다. 대화가 진리를 발견하는 수단이 된다는 기초가 여기서 마련되었다. 사람이 대화를 하면 아이디어가 서로 교환되면서 직관이 이루어진다. 그러나 신학에서는 정당한가? 좋은 결과를 내지 못하였다. 계시는 Imperative이다. 즉명적 관계이다. 우리와 연결점이 있어서가 아니고 하나님의 일방적 계시이다. 우리의 도구성을 가지고 일방적으로 드러내신 것이다. 그래서 성경의 진리에 있어서 대화는 진리를 발굴하지 못한다. 어떤 사람을 유화시키고 마음을 안정시키고 방향을 지도하는 것에 그 기능이 있으나, 그를 회심케 하거나 진리를 발견케 하지는 못한다.


Q3. 학교교육과 교회교육의 갈등문제

학교교육에 어떻게 잘 적응할 것인가가 최대의 관심이 되고 있다. 조기교육의 적극적 이해를 위해 언어교육은 빨리할수록 좋고, 다만 정확하게 배워야 한다. 언어 면에서는 빨리 적응해서 성취해야 한다.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조기에 재능이 발견되어도 바로 뛸 수 없는 것은 언어의 문제이다. 지식습득의 수단은 언어이다. 최소한 고등학교까지는 모든 과목을 제쳐 놓고 지식을 마음대로 취득하고 표현할 수 있는 언어교육이 최우선이어야 한다. 지식을 섭취하기 위해 언어를 배우기 시작하면 늦은 것이다. 최소한 영어, 불어, 독일어는 고등학교까지 마쳐야 한다. 외국어는 본토인이 교육하는 것이 좋고, 가능하면 그 언어권으로 가서 배우는 것이 좋다. 실제적인 어려움이 있다. 재정문제!!! 첨단장비를 도입하여 모든 교회가 활용할 수 있도록 하고 싶은데 지원하는 사람이 없다. 절약해서 기초자료, 책은 모으지만 범교회적으로 직접적인 효과를 낼 수 있는 교육장비를 구비하지 못하고 있다. 인적 자원의 개발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Q4. 직관교육의 방법론.

서양의 경우, 실제적으로 놀이문화를 통해 유아가 직관교육에 접촉할 수 있게 한다. 특히 독일의 경우.


Q5. 레비스트라우스의 직접직관, 교회교육도 학교교육의 전철을 밟는 권력화문제, 민족문화와 세계문화의 관계.

민족주의는 있어도 민족문화는 없다. 리꾀르트의 정의에 의하면, 인간의 인위적 개입이 있을 때는 언제나 문화가 존재한다. 민족문화와 세계문화의 충돌에 있어서 진행이든지 퇴보이든지, 핵심내용은 비가역적 사실의 축적과 그것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세계화에 대한 공헌과 무관하게 그것을 어느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이런 내용은 물건에 있지 않고, 열역학 법칙과 같은 것이다. 레비스트라우스의 핵심은 직접직관이 아니다. 하이데거나 포스트모더니즘의 문제는 언어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레비의 경우 로직을 발견하는 것이 핵심이다. 원시문화든 문화의 그림이든, 현대시대의 원초적인 논리가 거기에 다 있다. 문화가 표상되기 전에 인간의 근원과 관련해서 어떤 현상이 있는가? 교육의 권력화는 불가피하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 더 비판적으로 제거할 수 있다. 기독교학교는 루터가 강조, 나는 기독교학교를 반대한다. 일반학교에서 문화를 흡수하여 기독교문화를 창출하는 것이 더 사회에 공헌하는 것이다. 개혁교회의 신학적 내용으로, 신의 이름으로 인간을 가장 객관화시키는 신학적 내용으로 시대의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이런 배경이 우리에게 있다. 신화적 사고와 전혀 다르다. 말씀 외에는 다른 어떤 것에 의한 중재도 거절한다.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 인간이 전혀 깨닫지 못할 때에, 하나님의 가장 깊은 뜻과 의지를 따라 인간에게 환경과 역사를 주시고 그 부요한 것을 끊임없이 공급하시고, 그 역사의 현장에 우리를 세우셔서 말씀이 주어진 거룩한 핵심내용을 따라 미래의 독특한 삶을 구별하여 세우시고, 어느 누구도 동의할 수 없는 진리의 길을 걷게 하셨습니다. 시대의 증인으로 모든 기관이 하나로 동원되어 주를 증거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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