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4장 19-24절
교회사를 보면, 하나님께서는 "목숨 걸고 예배드리는 자들"을 높이 들어 사용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어둡고 습기 찬 지하무덤 카타콤으로 들어간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배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들은 예배를 위해서 자신의 지위, 재산, 건강을 포기했습니다. 그들의 예배는 "생명을 건 투쟁"이었습니다.
영국의 청교도들이 배를 타고 신대륙으로 건너간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배의 자유를 위해서 그들은 생명을 걸고 배에 몸을 실었습니다. 4개월의 항해 끝에 혹독한 겨울인 1620년 12월 11일 플리머스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인디언의 화살이 날아오는 가운데 추운 벌판에서 도착 감사예배를 드렸습니다. 추위와 열병으로 고생하는 가운데, 이듬해 가을까지 46명이 괴혈병과 폐렴으로 죽었습니다. 살아남은 사람들이 1621년 가을 추수를 하고 나서 제일 먼저 한 일이 무엇입니까? 예배였습니다. 눈물의 예배, 감격의 예배였습니다. 이것이 미국 추수감사절의 시작입니다.
하나님께 마음껏 예배를 드리기 위해 목숨을 걸고 바다를 건넜고, 예배를 위해 생존을 시작했던 미국이었기에 가장 빠른 시간 내에 세계 최강의 국가, 세계 최고로 부유한 나라가 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예배를 앞세우는 백성은 창대해지지만 예배를 우습게 알거나 무시하는 사람은 반드시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신앙인은 예배에 성공해야 신앙생활에 성공합니다. 신앙생활에 성공해야 인생에 진실로 성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배는 인생의 성패를 가름하는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창세기를 보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어디를 가든 먼저 "제단을 쌓고 야훼의 이름을 불렀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반면에 그의 조카 롯은 어디를 찾아봐도 "제단을 쌓았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두 사람은 똑같이 부자였고, 똑같은 환경과 조건에서 출발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의 말로는 사뭇 달랐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되는 축복을 누린 반면, 롯은, 아내는 소금기둥이 되고, 사위들은 다 불과 함께 잿더미가 되었고, 자신은 친딸과의 사이에서 아들을 낳아 모압과 암몬 족속을 만들어, 두고 두고 이스라엘의 가시 노릇을 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롯 자신도 패가망신을 하게 되었습니다.
예배가 한 사람의 운명을 이렇게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행복한 교회생활은 예배생활의 회복에 있습니다. 따라서 신앙생활의 성패는 예배시간에 달려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은 우리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며, 가장 긴급한 일입니다.
어떤 일도 예배 보다 더 바쁘고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그래서 누구와 약속이 되어 있을지라도 예배시간이 되면 약속을 뒤로 미루어야 하며 누구와 만남이 있을지라도 그 만남을 뒤로 미루어야 합니다. 예배 드리는 시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예배는 또한 하나님께 가장 영광스러운 일이 됩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올바르게 드려지고 있습니까? 우리가 드려야 할 예배란 어떤 예배입니까?
첫째로 하나님을 높여드리는 예배입니다
구약시대 때에 하나님께 드렸던 제사는 하나님을 높이는 행위였습니다. 즉 하나님께 제물을 드림으로써 하나님을 높이고 경배했습니다. 예배는 구약 히브리원어로 '입맞춘다,' '절한다'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발에 입맞추고 절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최대한 높이는 행위, 그것이 제사요 예배입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높이기 위해 우리가 지금 어떤 예배를 드리고 있는가? 하나님을 높이려는 마음으로 예배에 나오는가? 예배는 마음에서부터 드려져야 합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는 시작 전에 이미 결정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어느 시골에 한 분이 교회에 나온 지가 얼마 안됐는데, 부흥회 때에 목사님이 가정예배를 드려야 복을 받는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가정예배를 드리려고 아침에 가족들을 다 모았습니다. 이 사람은 찬송도 잘 부를 줄 모르고, 성경도 잘 찾을 줄을 모릅니다. 아무 준비도 없이 가정예배를 시작했습니다. 어떻게 해야할까 한참을 생각하다가 한가지 생각을 해냈습니다.
부흥회 때에 목사님이 '할렐루야!' 외치시는 것을 생각해내고는 따라하라고 하고는 '예수 만세'를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듯이 세 번 외쳤습니다. 하고 나니, 기분이 좋더랍니다. 이렇게 예배드리면 되겠구나 하고 가정예배를 드렸다고 합니다. 여러분 그분은 우리가 보기에 무식하게 예배를 드렸는지는 모르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향기로운 제물로 받으셨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마음으로 드리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자신을 드리는 예배입니다.
예배란 자신을 드리는 것입니다. 레위기 3장에는 제사를 드리는 자가 제물에 안수를 하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제물과 자신을 일치시킨다는 의미입니다. 즉, 안수하는 순간 자신과 제물이 일치되는 것으로 그 짐승 제물이 죽는 순간 자신이 죽는 것입니다. 제물이 태워지는 순간 자신이 태워지는 것입니다. 태워짐을 통해 완전히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입니다.
이처럼 구약의 제사는 죄악된 자신이 죽고 자신의 일생을 완전히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하는 헌신의 고백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예배에도 우리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는 헌신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배는 보는 것이 아니라 드리는 것입니다. 기도도 드리고 예물도 드리고 찬송도 드리고 몸도 마음도 다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드리는 우리의 예배를 하나님이 어떻게 받으시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시려면 우리가 바르게 드려야 합니다.
사1:12-14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예배는 참석하는 것이 아니라 드리는 것입니다. 자신을 완전히 비우고 태우는 시간입니다. 날 위해서는 아무 것도 남지 않는 시간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역사 하시며 그 예배를 통해 은혜를 주십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첫째 번의 자리는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리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도 우리를 위해 외아들을 주셨습니다. 가장 좋은 것을 우리에게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예배를 모든 일의 첫째 자리에 놓아야하는 이 순서가 뒤바꾸면 그때부터 우리는 뒤죽박죽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시간에 습관적으로 지각하는 것은 피해야 합니다. 예배 시간에 늦지 않고 오는 것도 중요한 일입니다. A. W. 토저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부르셔서 먼저 예배자로 만드시고, 그 후에 일하는 자로 만드신다." 먼저 예배자가 되어야 그 다음에 봉사자가 되는 것이지, 예배자가 되지도 못하고 봉사자가 된다는 것은 뒤집힌 것이며 잘못된 것입니다.
예배 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교회가 아무 일을 못해도 예배드리는 일만 잘해도 큰일을 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해야할 가장 큰 봉사는 예배입니다. 그래서 예배를 영어로 Service라고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셋째로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입니다.
하나님은 예배를 통해서 우리를 만나주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만나주시기 위해 예배시간을 만드셨습니다. 우리를 만나기를 피하거나 억지로 만나주시는 하나님이 아니시며, 우리와의 만남을 기뻐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왜 우리가 예배에 나올 때 기대감을 가지고 예배에 나와야 하는가? 나를 지으시고 이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 아버지를 이 자리에서 만나기 때문인 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어떠하십니까? 정말 기대감을 가지고 교회의 예배시간에 오십니까? 설레임이 있습니까? 애인을 만날 때처럼 기대감과 설레임이 있습니까?
기쁨과 환희가 있습니까? 감격이 있습니까? 야구선수가 세이브기록 하나만 올려도 감격하고 축구선수가 한 골만 넣어도 감격합니다. 집에서 아내가 남편으로부터 장미꽃 한 송이만 받아도 감격하는데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임에도 무덤덤, 감격이 없습니다. 이제 그 감격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예배시간에 졸면 안됩니다.
어느 부흥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목사님이 설교를 시작하자마자 어떤 교인 한 사람이 졸기 시작했습니다. 그것도 맨 앞에 앉아서 졸고 있으니 목사님의 심기가 편할 리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설교를 잠시 중단하고서 큰 소리로 이렇게 외쳤습니다. 지옥에 가고 싶으신 분은 모두 일어나시오! 그런데 목사님은 이 말 가운데서,
"지옥에 가고 싶으신 분은"까지는 아주 속삭이듯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 나머지 부분인 모두 일어나시오!는 정신이 바짝 들 정도로 큰 목소리로 외쳤습니다.
물론 졸고 있던 교인은 정신을 차리고서 모두에게 보라는 듯이 벌떡 그 자리에서 일어섰습니다. 맨 앞줄에 앉아 있다가 일어섰으니 모든 교인이 다 지켜보고 있어서 얼마나 무안했겠는가!
망신을 당한 것보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그 날 목사님이 설교했던 그 귀한 메시지, 천국에 관한 복음을 놓쳐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우리도 예배 때마다 정신을 차리지 않는다면 예외일 수는 없습니다.
종교 개혁자 요한 칼빈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도중에 벌이 날아와서 쏘더라도 꼼짝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요즘 우리는 예배드리다가도 핸드폰이 울리면 그것을 들고 나갑니다. 미리 꺼두든지 잊었더라도 즉시 꺼야 합니다. 경건하게 드리는 예배 가운데 하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께로부터 왔기때문에 하나님을 만나야 인간의 답이 오고 힘이 오고 풀려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러 나온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을 높이고, 자신을 드리고, 하나님을 만나서 하나님께 늘 온전한 예배를 드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