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막 안에서의 예배(1)
홍명철목사
(S,I 은혜장로교회, 나이스크월드미션 사무총장, 뉴욕개혁신학대, 대학원교수 /합동)
" 하나님을 위해서 일하려고 하는 사람은 가장 우선이 되어야 하는 것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떤 의미가 있는지, 그것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 알아야 한다. " 이 말은 현대 교회들에게 깊은 묵상을 하게 한 토저박사(A.W Tozer)의 외침입니다. 예배가 인간들에 의해 주장되고 진행되고 주관한다는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온갖 기술을 동원하듯이 예배는 그렇게 기교를 부리면 진행되고 말았습니다. 예배의 형식과 방법의 다양성을 부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해야 한다는 것을 잊어버림에 회복이 필요하다는 사실입니다.
이번 강좌는 그런 의미에서 예배를 가지지 않은 사람들에게 예배의 귀중함을 가르쳐주고 제시해주신 성막을 봄으로 어떻게 하나님 앞에 나가야 할 것이며 어떻게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림이 합당한 예배가 되는가를 살펴보았으면 합니다.
구약에 나오는 성막은 죄악의 황무지를 떠나 하나님의 면전으로 가는 영혼의 내적 여행을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돌아온 죄인은 바깥뜰에 들어가야 할 것이며 놋 으로된 번제단에서 피의 제물을 드리고 가까이 있는 물두멍에서 자신을 씻는 것입니다. 휘장을 통하여 성소에 들어가 등대의 은은한 빛과 같은 주님을 볼 수 있게 되고 떡상에서 주님을 보아야 할 것이며 분향단에서 올려지는 연기와 같은 기도의 삶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성소까지 가서 많은 것을 누렸을지라도 아직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예배자는 최종의 자리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지성소/말씀의 자리)까지 가야 그것이 참된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희생이 필요하며 죽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주님이 죽으심으로 인해서 휘장이 찢어졌고 그 사건으로 우리는 예배가 있게 되었습니다. 예배라는 단어는 구원받은 사람만이 외칠 수 있는 말입니다. 천국에는 예배만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성막은 예배로 시작되어서 예배로 끝나는 곳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동안 강 문호목사님과 함께 성막선교회를 미주 안에서 설립하여 연구 및 세미나를 가지면서 가지고 있는 지식과 세미나의 내용들 가운데 중요한 부분들을 시리즈로 연재가 될 것입니다. 이 성막을 들여다보면서 나이스크가 주장하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참된 예배의 회복의 모습을 성막으로 찾아보고 싶습니다. 성막의 서론중 10가지의 필요한 이유에 대한 것을 알아보기로 합니다. 성막세미나를 개최하는 가운데 특별히 초청을 한 랑카스터의 성막을 제작한 제어 박사(Dr.Jehr)는 세미나중에서 " 교인들이 나아갈 길을 가장 충분하게 효과적인, 보다 확실하게 보여주는 것이 성막이라고 "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성막은 왜 중요합니까?
1.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길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관심사는 무엇일가요? 건강일가요? 돈일까요? 행복일가요? 이런 것들은 사람에게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구원입니다. 구원은 예배와 연관이 있습니다. 구원 얻지 못한 사람에겐 예배란 단순한 모임일 뿐입니다. 그런 모임의 자리에 우리는 앉아 있는지도 모릅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의 변동의 역사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가죽옷을 입고 하나님을 만났습니다(창3;21) 노아나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은 돌 제단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창8:20-22, 15:12-21, 46:1-3)
그러나 모세 이후에는 성막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성막에서 사람을 만나 주셨기 때문입니다. 성막을 완성시키던 날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출25:22) 이 "거기서 내가 만나고 -I will meet with you- " 라는 단어는 교회가 가장 우선이 되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예배는 하나님은 만나는 길입니다. 성막 곧 교회는 하나님을 만나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예배의 단어는 구원받은 백성들이 당연한 말해야 하는 용어요 단어입니다.
2.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알고 바로 믿을 수 있게 됩니다.
구약의 중심은 오실 예수, 신약의 중심은 <다시 오실 예수>입니다. 그러므로 신구약의 중심은 예수입니다.
성막을 보는 세 안경이 있습니다.
제1안경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을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 하는 것이로다>(요5:39)
성경은 모두 예수님을 가르쳐 주는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제2안경
<모세를 믿었다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니라. 그러나 그의 글도 믿지 아니 하거든 어찌 내 말을 믿겠느냐?> (요4:46-47)
모세의 글은 모두 예수를 말하여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모세 5경이 예수 이해의 첫 단추가 됩니다. 그런데 모세 5경중 가장 중요한 부분은 성막입니다.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는 성막을 모르고는 결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제3안경
<우리가 이 같은 소망이 있으므로 담대히 말하노니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로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치 못 하게 하려고 수건을 얼굴에 쓴 것같이 아니 하노라.
그러나 저희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라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오히려 벗어지지 않고 있으니 그 수건을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오히려 그 마음을 덮었도다.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어지리라.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3;12-18)
특별히 성막에서 흠없는 짐승을 끌고 와서 안수하여 죄를 전가시켜 죽임으로 죄 사함 받았던 제사의 모습은 가감 없이 그대로 그리스도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짐승피로 예수 피를 말하여야 합니다.
제사로 예수를 말해야 합니다.
우리가 말하는 예배의 회복은 진정 교회 안에서 이루어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제사가 성막이나 성전이나 교회 밖에서 이루어진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서 참된 예배가 이루어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성막으로 예수를 말해야 합니다. 이것도 마찬가지로 구원받은 우리가 예배의 참된 모형이 되시는 주님을 본받을 뿐 아니라 그분을 높여드려야만 하는 것입니다.
예배는 구원받은 백성이 행하는 예식입니다.
절기로 예수를 말해야 합니다.
구약은 죄인을 위하여 짐승이 죽고, 신약은 죄인을 위하여 예수께서 죽으셨습니다.
3. 성경에서 50장이 성막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에서 13장, 레위기에서 18장, 민수기에서 13장, 신명기에서 2장, 히브리서에서 4장 모두 50장이 성막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막을 모르면 성경에서 막대한 부분에 무지하게 됩니다. 그리고 다른 곳에서 등장하는 성막이야기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4. 성막은 죄인의 구원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성막은 너무나 귀한 자리입니다. 왜냐하면 다음 몇 가지 이유에서입니다.
(1) 하나님께서 죄인을 만나주시는 장소입니다.
죄인은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캄캄한 방에서 태양을 볼 수 없듯이 죄를 가진 인간은 하나님을 도저히 만날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성막 안에서 죄 된 우리를 만나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출25:22)라고 언약하셨습니다.
(2)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시는 장소입니다.
빌립은 하나님을 보여 달라고 예수께 요청하셨습니다. 그때 예수께서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요14:9)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본 자는 하나님을 본 자입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림이 없으니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자이신 하나님이 나타나셨느니라>(요1:18) 그리고 성막을 본 자는 예수를 본 자입니다. 성막이 곧 예수이기 때문입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행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출25:22)
(3) 하나님께서 죄인들과 말씀하시는 장소입니다.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고 싶은가요? 성막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회막에서 모세를 부르시고 그에게 일러 가라사대>(에1:1)
<이는 너희가 대대로 여호와 앞 회막문에서 드릴 번제라. 내가 거기서 너와 만나고 네게 말하리라>(출29:42)
이같이 성막은 하나님과 죄인이 만나 같이 대화하는 너무도 흥분된 곳입니다.
하나님은 늘 죄인들과 대화를 하고 싶어 하십니다. 그 자리가 바로 성막입니다. 또한 성막 안에서의 예배는 하나님과의 참된 대화의 자리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늘 성막에서 모세를 비롯한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셨습니다.
(4) 하나님이 죄인을 받아 주시는 장소입니다.
하나님께서 다른 곳에서는 죄인을 안 만나 주십니다. 다른 곳에서 하나님을 만나면 급살 맞을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성막에서는 죄인을 만나주시고 받아 주십니다.
<그가 번제물의 머리에 안수할 지니 그리하면 열랍되어 그를 위하여 속죄가 될 것이라>(레1:4)
이는 하나님께서 죄인을 받으시는 모습이요 방법입니다.
구약은 흠없는 짐승이 죽고 신약은 흠없는 예수님이 죽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대속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엡1:7)라고 바울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죄인은 성막에서 제물을 드렸고, 하나님은 받으십니다. 그것이 바로 용서받았다는 영수증입니다. 제단에서 불이 타오를 때 이는 바로 용서의 표징입니다.
이 같이 성막은 죄인이 구원받는 유일한 장소입니다. 그리고 죄인이 구원받는 유일의 방법입니다.
5. 성령이 인도하시는 생활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됩니다.
가장 철저한 성령의 인도, 가장 분명한 성령의 인도는 성막의 인도입니다. 성막 완성후 바로 성막에 구름기둥이 임하였습니다. (출40:33)
<그 후에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매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수 없었으니 이는 구름이 회막위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함이었으며 구름이 성막위에서 떠오를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그 모든 행하는 길에 앞으로 발행하였고 구름이 떠오르지 않을 때에는 떠오르는 날까지 발행하지 아니 하였으며 낮에는 여호와의 구름이 성막 위에 있고 밤에는 불이 그 구름 가운데 있음을 이스라엘의 온 족속이 그 모든 행하는 길에서 친히 보았더라>(출40:34-38)
성막시대의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역사는 오늘날 성령의 역사와 동일합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처럼 성령은 다음과 같이 7가지 신호를 우리에게 주고 있습니다.
(1)출발신호
<구름이 성막위에서 떠오를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그 모든 행하는 길에 앞으로 발행하였고 구름이 떠오르지 않을 때에는 떠오르는 날까지 발행하지 아니 하였으며>(출40:36-37)
. 성막시대에는 구름기둥이 출발신호를 주었습니다. 그러나 소아시아 7교회에게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라시며 늘 성령께서 출발신호를 주셨습니다.
(2) 방향신호
낮에는 여호와의 구름이 성막위에 있고 밤에는 불이 그 구름가운데 있음을 이스라엔의 온 족속이 그 모든 행하는 길에서 친히 보았더라>(출40:38)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리 갈까 저리 갈까 도무지 고민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어디로 갈까 기도도 하지 않았습니다. 구름기둥이 가는 곳으로 방향을 잡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사람이 계획을 세울지라도 발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니라>(잠16:19)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잠16:3)
하나님께 전적 복종이 완전 자유인입니다.
(3) 사랑신호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두 가지 사랑입니다.
1.알맞는 사랑
밤에는 추운 광야이니 따뜻한 불기둥으로 인도하셨습니다. 낮에는 더운 광야이니 시원한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얼마나 알맞는 사랑입니까. 만일 반대로 낮에는 불기둥으로, 밤에는 구름기둥으로 인도했다고 봅시다. 얼마나 고역이었을까요? 또 밤에는 어두워 구름기둥이 안 보일 테니 잘 보이라고 불기둥으로 인도하고, 낮에는 불기둥이 밝은 해 때문에 안 보일 테니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신 것이 얼마나 놀랍고, 얼마나 알맞은 사랑인가요? 너무나 놀라운 사랑이요, 너무나 기가 막힌 사랑이요, 너무나 신비한 사랑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성령으로 우리를 사랑하고 계십니다.
2.언제나 사랑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언제나 사랑하신다는 뜻입니다. 밤낮으로 변함없이 사랑하십니다. 지금은 성령이 우리와 늘 같이 계십니다.
(4) 생활신호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발도, 도착도, 출발과 도착사이의 생활도 모두 구름기둥에 의존하였습니다. 두 기둥이 머무는 기간이 생활기간이요, 머무는 공간이 생활공간이었습니다. 한 치도 벗어나면 추워서 죽고, 더워서 멸망되었습니다.
(5) 하나님 신호
200만 이스라엘 백성 모두가 이 두기둥을 친히 다 보았습니다(38절) 두 기둥은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는 증거입니다. 구름기둥, 불기둥을 친히 보고 따라 다니며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살아 계셔서 하나님이 주신 신호다>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성령의 역사는 하나님의 신호입니다. 지금은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우리의 마음을 두드리십니다.
(6) 영광 신호
<그 후에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매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수 없었으니 이는 구름이 회막위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함이었으며> (출40:34-35)
하나님의 영광이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나타나셨습니다. 두 기둥이 나타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두 기둥은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겠다는 하나님의 의도이기도 하였습니다.
(7) 선교 신호
<온 족속이> 친히 보았습니다. 온 족속이 이를 보게 하여야 합니다. 여기에 선교의 당위성이 있습니다. 누구도 빠져서는 안 됩니다. 다 보아야 합니다. 다 동참해야 합니다. 두 기둥의 테두리에서 벗어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온 족속이 구원받도록 성령은 지금도 맹렬히 활동하고 계십니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4-8)
성령은 선교의 성령이십니다.
그때 두 기둥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은 이제는 성령으로 인도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막공부를 하면 성령의 인도하심이 어떠한지를 알아 성령의 인도를 받을 수 있습니다.
6. 신앙생활의 전체를 한 눈으로 볼 수 있습니다.
문에서 구원론을, 번제단에서 죄론과 보혈론을 배울 수 있습니다. 등대에서 사명론을, 떡상에서 축복론과 헌신의 생활을, 분향단에서 기도론을, 법궤에서 부활론, 천국론, 계시론,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배울 수 있습니다. 이것이 신앙생활 전체요, 성경의 전체입니다. 이것이 믿음생활의 완벽한 모형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성막 공부는 균형 잡힌 신앙생활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7. 가장 좋은 모형입니다.
성경에는 모형이 많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형을 통하여 수많은 진리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1)사람을 통한 모형
아담은 오실 예수님의 표상이라고 성경은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니라>(롬5;14)
(2) 사건을 통한 모형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넌 것은 세례의 모형입니다. 그리고 반석에 물이 나와서 광야에서 마신 것은 예수님이 주신 생명수의 표상입니다.
<다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 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 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고전10:1-4)
(3) 행동을 통한 모형
광야에서 모세가 구리 뱀을 높이 들었습니다. 이것을 믿음으로 본 이들은 구원을 받았고 보지 못 한 이들은 구원을 받지 못 하였습니다.이는 십자가의 모형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문설주에 피를 발라 구원받았습니다. 이도 십자가 피의 모형입니다.
라합이 붉은 줄을 창에 맴으로 생명을 얻었습니다. 이런 행동도 십자가 피의 구원의 모형입니다.
(4) 사물을 통한 모형
도피성은 예수님의 사역의 모형입니다. 예수님에게로 가는 자는 어떤 죄를 지었다고 하더라도 생명을 얻습니다. 당연히 죽어야 할 몸이 복음으로 구원받는 모형입니다.
(5) 희생제물을 통한 모형
성경에서 가장 예수님을 잘 나타내 주는 것은 희생제물입니다.흠없는 짐승이 안수를 통하여 죄를 전가 받아 죽는 모형은 가장 정확하고도 분명한 그리스도의 모형입니다.
구약성경에서 첫 번째로 예수님을 잘 나타내주는 단어는 아사셀 양입니다.
구약성경에서 두 번째로 예수님을 잘 나타내주는 단어는 유월절 양입니다.
구약성경에서 세 번째로 예수님을 잘 나타내주는 단어는 이삭대신에 죽은 이삭 양입니다.
성막은 바로 이런 모형입니다. 가장 보기에 정확하고 가장 분명한 모형입니다.
그래서 성막을 공부하여야 합니다.
8. 복 받는 길을 정확히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복주시려고 계획하고 계십니다.(신5:29)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이렇게 축복하여 이르러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시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찌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민6:22-27)
하나님의 뜻은 축복입니다.
(1) 아담과 하와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첫 선포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고 첫 번 선포는 축복선포였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생육하고 번성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2:27-28)
(2) 노아에게 주신 말씀
온 인류가 홍수로 다 멸망당하였습니다. 노아와 가정만 남았습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주신 말씀도 축복의 선포였습니다.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하라>(창9:1)
(3) 아브라함에게 주신 말씀
아브라함을 메시야의 첫 조상으로 선택하신 하나님께서는 선택하자 말자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창12:2)고 말씀하셨습니다.
(4) 이삭에게 주신 말씀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나타나 처음 하신 말씀도 축복이었습니다.
<이 땅에 유하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고 내가 이 모든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창26:3)
이같이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선택하시고는 꼭 복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복되게 살지 못 하는 것은 하나님 책임이 아니라 인간의 책임입니다.
9. 영혼의 종합진단을 받을 수 있습니다.
육의 고장은 병원에서 진단하여 고치게 됩니다. 그러나 영의 고장은 성막에서 말씀으로 고치게 됩니다.
무슨 병인지 모르는 것이 가장 큰 병입니다. 성막을 문부터 법궤까지 공부하면 영이 어디가 고장나 있는지 영의 종합진단을 받을 수 있게 됩니다.
(1)문에서
나는 정말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의 유일한 구주로 고백하고 있는가?
(2)번제단에서
나의 죄는 무엇인가?
나의 죄를 예수 피로 속죄함 받은 것을 확실히 믿는가?
용서받은 의인이라는 확신이 있는가?
(3)물두멍에서
나는 죄를 버린 후 성결된 생활을 하고 있는가?
중생하고 지은 죄의 사슬을 끓었는가?
버리지 못하고 끌려 다니는 죄는 없는가?
(4)촛대 앞에서
나는 빛된 생활을 하고 있는가?
나는 사명에 충실하고 있는가?
(5)떡상앞에서
나는 헌신의 생활을 하고 있는가?
나는 생명의 떡인 예수 그리스도를 영의 양식으로 삼고 있는가?
(6)분향단앞에서
나는 기도를 잃어버리지는 않았는가?
나는 날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찾고 있는가?
(7)법궤 앞에서
나는 주님을 통하여 부활할 것을 믿고 있는가? 나는 말씀 속에서 살려고 애쓰고 있는가? 나는 죽은 나무에게도 싹이 나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확실히 믿는가? 나는 욕심을 부리지 않고 만나와 같은 일용할 양식을 구하고 있는가?
이같이 성막 공부를 하면 영의 종합진단을 받을 수 있습니다.
10. 하나님의 일꾼이 됩니다.
진정으로 알면 행동으로 옮기게 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성막을 공부하면 성경의 진리를 일목요연하게 알 수 있기에 하나님의 일을 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꾼이 자동적으로 됩니다. 어설프게 예수를 알았던 베드로는 예수를 배반하기도 했었습니다. 그러나 성령 받고 예수를 분명히 안 다음부터 베드로는 예수께 모두를 드릴 수가 있었습니다.
<결론>
위와 같이 교회 안에 올바른 예배의 드림이 왜 필요한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교회들은 재미를 종교화했다는 토저박사의 이야기를 깊이 묵상해보아야 할 시점입니다. 많은 방법들을 동원해봅니다. 안되면 다른 방법을 만들고 그것도 성이 차지 않으면 연예 방법, 오락을 동원하여 사이비적인 요소들로 교회를 이끌고 가려고 합니다.
욕구에 차지 않은 현대 성도들은 더 많은 욕구심에 의해서 교회를 찾고 있습니다. 재미를 종교의 상징으로 만들고 말았습니다. 예배의 본질만 추구해도 될 일을 이젠 본질도 외면하게 되어 재미로만 전락이 되어져 외부적인 활동이 교회의 경건으로 되어져 간다는 것은 하나님 없이 인간이 인간의 일을 하는 것으로 결론되어져 가는 것을 보고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계신 그 자리에 우리가 있어야만 한다는 말을 해야만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자리는 하나님을 섬기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이스크의 예배회복 운동은 교회를 교회답게 만드는 사역이며 예배를 원래의 방향으로 놓아야 하는 운동이며 목회자에게 영적 권위를 평신도에겐 진정한 헌신자로 만들며 1.5세과 2세들에게 참다운 교회관과 예배관을 가르쳐주는 사역입니다.
앞으로 나이스크 예배회복운동은 전 세계적으로 놀라운 역사를 일으킬 것이라 여겨집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가장 원하시는 사역을 이루어나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음 연재>
1. 성막의 변천과 예배
2. 성막규모와 예배
3. 성막 뜰 기구와 예배
4. 성막의 성소의 기구와 예배
5. 지성소와 예배의 관계
6. 성막과 현대교회의 예배
7. 잘못된 드림에 대한 성경교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