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충만은 힘과 용기의 근원
I. 들어가는 말
사도행전은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에서의 사역이 제자들에 의해서 지속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실제로 사도행전은 누가복음의 속편으로서 불려지고 있다. 성령의 역사를 중심으로 보면 누가복음은 예수의 사역을 통해서 성령이 역사하는 것이고 사도행전은 사도들의 사역을 통해서 성령이 역사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제자행전이 아니고 사도행전인가? 이 용어에 대한 사용은 누가복음 9장에서 정확하게 드러난다.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파송할 때는 제자들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지만 그들이 예수님의 파송을 받아 일을 하고 돌아올 때는 사도라는 명칭을 사용한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에 제자들을 모두 사도라 일컬어진다. 사도행전은 예수 그리스도 없이 예수님의 일을 제자들이 대신 하기에 사도행전이라 일컬어진다. 예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들의 선교 여정 혹은 선교 열전이라고 할 수 있다.
본문은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 이후에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사도들의 특정한 사건을 보도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성령강림절은 교회의 시작이라고 알려져 있다. 다시 말해서 최초의 교회인 예루살렘 교회는 성령의 내리심의 역사와 함께 시작한 것이다. 사도행전은 교회의 급성장을 증거하고 있다. 교회의 첫 부흥은 사도들의 헌신적인 전도와 목회에 기인한다. 사도행전은 이러한 사도들의 선교의 역사를 성령 충만의 역사라고 증언한다. 본문도 성령 충만한 사도들에 의해서 일어난 특정한 사건을 보여 주고 있다.
II. 본문의 위치
사도행전 1장에서 사도들은 부활하신 예수의 명령을 따라 예수살렘 성으로 돌아와 머물렀다. 약 일백이십 명 정도가 함께 모여 기도하는 가운데 그들은 가룟 유다 대신에 맛디아를 제비 뽑아 열두 제자의 반열에 서게 했다. 그들이 다락방에 모이고 함께 기도한 것은 신앙 공동체의 출발을 암시하고 있다. 그들이 함께 한 곳에 모여 있을 때 성령의 내리심을 체험하게 된다. 성령의 내리심은 강한 바람이 온 집에 가득했으며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그들 각자에게 임했다. 영의 의미는 바람, 숨, 영 등의 다양한 뜻을 가지고 있다. 성령이 바람으로 온 집안에 가득한 현상은 성령의 존재와 무관하지 않다. 구약에서 불은 하나님의 임재와 연관이 있다:“산 위의 여호와의 영광이 이스라엘 자손의 눈에 맹렬한 불같이 보였고”. 또한 불은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한다. 불의 혀라는 표현이 불이 활활 타올라서 갈라지는 형상을 설명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연관해서 각 사람에게 임하는 현상은 매우 기이한 모습으로 보인다.
성령이 강하게 내리시고 역사하여 얻은 결과는 그들이 모두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방언을 말하기 시작한 것이다. 오순절(맥추절, 칠칠절이라고도 함)을 지키기 위해 천하 각국에서 예루살렘으로 온 유대인들은 이들의 방언을 듣고 소동하여 기이히 여겼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본다고 하였고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새 술에 취했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이 날에 일어난 방언의 역사는 바울의 교회에서 교인들에게 주어지는 하나의 직책인 방언의 은사와는 성격이 다르다. 고린도 교회의 방언은 누구도 알아들을 수 없는 기도의 언어이며 사람과의 의사소통이 아닌 하나님과의 영적인 의사소통의 수단이 되고 있다. 반면에 오순절에 나타나는 방언은 여러 지방의 말을 갈릴리 출신들의 제자들이 말하면 각 사람이 알아듣는 그야말로 신비한 기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일어난 다른 놀라운 일은 베드로가 말씀을 선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예수를 배반하고 두려워 숨어 있었던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이 담대하게 많은 사람들 앞에 서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게 된 것이다. 베드로는 구약의 요엘서를 인용하여 말세에 하나님께서 자기의 영으로 모든 육체에 부어 주실 것이라는 예언을 시작으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선포하고 있다. 놀라운 변화이다. 성령의 충만은 이렇게 사람을 변화시킨다.
베드로의 계속되는 설교와 사도들의 담대한 증거를 통해 믿는 사람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고, 이적이 일어나면서 예루살렘 교회는 신자들의 기도와 말씀과 찬송으로 가득차게 되었다. 이러한 은혜 가운데 있었던 사도들을 유대 당국자들이 가만 두지 않았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던 유대 당국자들은 사도들을 체포한 것이다. 본문은 체포된 사도들이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히 심문을 받는 모습의 한 부분을 증거하고 있다. 본문은 사도들이 잡힌 이유와 베드로가 재판 과정에서 담대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증거하고 있는 가를 보여 주고 있다.
III. 나오는 말
본문을 통하여 산 헤드린 공회 의원들 앞에서 담대한 사도들의 증언을 분석하여 보았다. 그들의 담대함의 원인은 두말할 것도 없이 성령 충만함이었다. 성령 충만함은 사도들로 하여금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를 갖게 해 주었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의 진리를 망설이지 않고 증거 할 수 있게 해 주었다. 고침 받은 병인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병이 나았다는 것이 복음이 될 수 없다. 복음은 병 고침의 근원이신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런 점에서 성령 충만한 베드로의 증언은 참으로 위대한 복음의 증거라고 말할 수 있다.
설교를 위한 하나의 제언은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인가?”이다. 공회 앞에서 행한 베드로의 증언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에서 부활하신 부활의 주이다. 부활은 하나님의 능력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새로운 몸을 입는 것으로서 믿는 모든 사람이 마지막 날에 이 부활에 참여케 된다. 이러한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 이전이나 이후에 인류 역사상 어디에도 일어난 적이 없다. 이런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의 첫 열매이며 우리는 부활의 소망으로 인내하며 살아간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는 모퉁이의 머릿돌이다. 건축자들이 버린 돌을 집 모퉁이의 기초석으로 삼으신 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토기장이로서 그릇을 자기 목적으로 쓰실 권한이 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셨고, 보좌 우편에 앉게 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를 생명의 근원으로 만드셨고 구원의 근원으로 만드신 것이다.
셋째,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구원이시다. 만물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 안에서 통일된다. 그리스도가 통일의 원리이며 구원인 것이다. 예수께서 구세주라는 말은 그가 만물의 구원자인 동시에 심판주임을 말하는 것이다. 모든 만물이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주라고 고백하며 그의 심판대 앞에서 심판을 받아야 한다. 어떤 피조물이라도 피해갈 길이 없으며 어떠한 죄도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주 만물의 중심이며 만물의 구세주이시다. 예수 이름 외에는 구원할 이름이 세상에 없다.
설교를 위한 다른 하나의 주제는 성령 충만함과 관련된 것이다. 아무리 훌륭한 복음의 내용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그것을 선포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도록 감동을 주시고 인도해 주시는 분은 성령님이다. 성령의 충만함이 복음은 아니다. 복음이 자동차라면 성령의 충만함은 마치 자동차의 기름과 같은 것이다. 이런 점에서 성령 충만함을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성도의 “놀당망두”의 믿음으로 설명하고자 한다.
놀은 ‘놀라지 않는다’의 놀이다. 당은 ‘당황하지 않는다’이다. 망은 ‘망설이지 않는다’의 망이다. 두는 ‘두려워하지 않는다’이다. 성령 충만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게 만드신다. 성령 충만한 자는 사탄의 어떠한 간계와 궤휼에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직 주님만을 의지하기 때문이다. 성령 충만을 통해 놀당망두의 신앙을 가진 사람은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이 된다.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해도 능히 이겨낼 수 있는 힘과 용기의 근원이 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