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W. 토저
세상의 영
세상의 영(靈)은 아주 강하다. 그렇기 때문에 마치 연기 냄새가 옷에 배듯 우리에게 착 달라붙는다. 세상의 영은 상황에 따라 교묘하게 그 모습을 바꾸기 때문에, 선악을 분별할 수 있는 훈련이 되어있지 않은 단순한 그리스도인들은 자주 속아 넘어간다. 세상의 영은 온갖 종류의 신실한 모습으로 위장하여 기독교를 농락한다. 그것은 때때로 (특히 수난주간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기도 하며, 심지어 언론을 통해 자기 악행을 고백하기도 한다. 세상의 영은 기독교 신앙을 찬양하기도 하고, 자기 목적을 이루기 위해 교회에 아첨하기도 한다. 세상의 영은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기 위한 캠페인에 동참하는 등, 자선사업에도 적극적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이런 것들을 결코 인정하지 않으신다. 결정적인 순간에, 세상의 영은 그리스도의 영을 대적한다. 세상의 영의 대변인이라고 할 수 있는 세상의 언론은 종종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불리한 편파 보도를 일삼는다. 철저하게 사실을 확인해본 결과 교회가 옳다고 증명되었을 때, 세상의 언론은 마지못해 사실을 사실대로 보도한다. 그럴 경우에 그들은 자기들이 교회에 무슨 큰 은혜를 베푸는 것처럼 생색을 내기도 하고, 교회를 은근히 비꼬며 경멸하기도 한다.
세상의 아들들과 하나님의 아들들은 모두 영(靈)의 지배를 받는다. 그러나 거듭난 자들의 마음속에 거하시는 성령님과 세상의 영은 천국과 지옥이 다르듯이 서로 다르다. 세상의 아들들과 하나님의 아들들은 서로 반대 입장에 서 있을 뿐만 아니라 서로 공격한다. 성령님의 일들이 황당하다고 느껴질 때 땅의 사람들은 낄낄거리며 조롱한다. 성령님의 일들을 이해할 수 없을 때 그들은 재미없다며 하품한다.
“그러나 본성대로의 사람은 하나님의 영의 일들을 받아들이지 아니하나니, 이는 이 일들이 그에게는 어리석은 것이기 때문이요, 또 알 수도 없나니, 이는 이 일들이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고전 2:14)
종교가 되어버린 ‘종교적 관용’
요한일서를 보면 두 단어가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그들’과 ‘너희’이다. 이 두 단어는 전혀 다른 두 세계를 대표한다. '그들'은 아담의 타락한 세계에 속한 사람들을 가리킨다. '너희'는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린 ‘선택된 자들’을 가리킨다. 안타깝게도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종교적 관용(寬容)이 거의 제2의 종교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요한은 ‘종교적 관용’이라는 우상 앞에 무릎 꿇지 않았다. 그는 종교적 관용을 단호히 거부했다. 그는 ‘관용’이라는 것이 실상 ‘무관심’이라는 것을 간파한 사람이다. 우리가 요한의 교훈을 받아들이려면 확고한 믿음이 있어야 한다. 달리 표현하면, 기독교의 유일성을 온전히 받아들이려면 믿음이 강해져야 한다. 믿음이 강해지기보다는 기독교와 다른 종교들 간의 경계를 허물고 모든 사람의 비취를 맞추는 것이 더 편하다는 얄팍한 계산이 종교 관용론자들의 마음속에 깔려 있다고 생각된다.
그들은 신자들과 불신자들을 한데 묶어 ‘우리’라고 부르는 것이 자신들을 노출시키지 않는 훨씬 안전한 방법이라고 느낄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대언자 다니엘’의 아버지일 뿐만 아니라 ‘멋쟁이 잭’의 아버지이기도 하다고 선언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어느 누구도 불쾌하게 만들지 않는다. 그들의 말을 들으면 모든 사람들의 마음은 편안해지고 모두 천국에 들어가리라고 믿게 된다. 그러나 최후의 만찬석에서 예수님의 품에 기대어 앉아 귀를 기울였던 요한이 이런 사람들의 말을 들었다면 결코 속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인류를 두 무리로 나누었다. 물론 그 두 무리는 부활의 때에 영원한 상을 얻을 무리와 영원한 절망에 빠질 무리이다. 한쪽에는 하나님을 아는 '너희'(때로는 이것이 ‘우리’로도 표현된다.)가 있고 다른 한쪽에는 예수님을 모르는 '그들'이 있다. 이 두 무리 사이에는 아무도 건널 수 없는 너무나 큰 도덕적 심연이 가로놓여 있다.
이것에 대해 요한은 이렇게 말한다.
“어린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그들을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분께서 세상에 있는 그보다 더 크심이라. 그들은 세상에 속한 고로 세상에 속한 말을 하매, 세상이 그들의 말을 듣느니라.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이로써 진리의 영과 오류의 영을 아느니라.”(요일 4:4-6)
요한의 언어는 너무나 분명하기 때문에 진정으로 진리를 알기 원하는 사람들은 그의 말을 결코 오해할 수 없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의 문제는 ‘이해’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과 순종’의 문제이다. 우리는 “이것이 무슨 뜻인가?”라는 신학적 질문을 던질 필요가 없다. 우리는 “내가 이것을 믿고 순종할 것인가?”라는 도덕적 질문을 던져야 한다. 우리 모두 자신에게 다음과 같이 물어보자. 내가 사람들의 냉소적 시선을 견딜 수 있는가? 자유주의자들의 매서운 공격에 맞설 용기가 있는가? 나의 태도를 보고 모욕감을 느껴서 나를 미워하게 될 사람들에게 맞설 수 있는가? 수많은 사람들이 따르는 ‘인기 있는 종교’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외롭게 사도들이 간 길을 따를 수 있겠는가? 요컨대, 죽음과 치욕의 십자가를 질 수 있는가?
무엇이 ‘세상’인가?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세상과 구별되라’라고 명령하신다. 여기서 우리는 ‘세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명히 알아야 한다. 우리는 ‘세상’을 ‘눈에 보이는 것’으로 해석하기 때문에 그것의 진짜 의미를 놓치는 경향이 있다. 카드놀이, 술, 도박 같은 것들은 세상이 아니라 단지 세상이 외형적으로 드러난 것이다. 우리는 단순히 이렇게 외형적으로 나타난 것에 대항하여 싸우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세상적 현상들’에 대항하여 싸울 것이 아니라 ‘세상의 영(靈)’에 대항하여 싸워야 한다.
구원받은 사람이든 그렇지 못한 사람이든 인간은 본질적으로 영(靈)이다. 신약성경이 말하는 세상은 ‘거듭나지 못한 인간의 본성’이다. 이 본성이 선술집에서 발견되든 교회에서 발견되든 그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바로 ‘세상’이라는 사실이다. 타락한 인간의 본성에서 나오는 것들, 그것에 근거하여 만들어진 것들, 그 도움으로 이루어진 것들, 이것들은 그 외형이 도덕적으로 저질이든 고상하든 모두 세상이다.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을 보라. 그들이 얼마나 열성적으로 율법을 따랐는가? 그러나 그들은 세상의 진수를 보여준 사람들이다. 그들의 종교 체계는 하늘에 속한 원리가 아닌 땅에 속한 원리 위에 세워졌다. 그들은 예수님께 대항하기 위해 인간적인 간계(奸計)를 사용했다. 진리를 수호한다는 명분을 내세운 그들은 사람들에게 뇌물을 주어 거짓을 말하도록 했다. 입으로는 하나님을 수호하겠다고 말하면서 마귀처럼 행동했다. 성경을 옹호하기 위해 성경의 교훈을 무시했으며, 종교를 구한다는 미명으로 종교를 말살시켰다. 사랑의 종교의 이름으로 맹목적인 증오를 퍼뜨렸다. 그들은 하나님께 반항하는 저주스런 세상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었다. 결국 극도로 포악해진 세상의 영(靈)이 기어이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고 말았던 것이다. 바리새인들의 영(靈)은 예수님의 영(靈)을 극렬히 대적했다. 이 두 영(靈)은 그들이 대표하는 두 세계의 본질을 드러냈다.
오늘날 어떤 선생들(극단적인 세대주의자들)은 “산상수훈은 우리 세대가 아닌 다른 세대에 해당하는 교훈이기 때문에 교회가 그것을 지킬 의무가 없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이 얼마나 큰 악을 저지르는지 잘 모르고 있다.
산상수훈은 ‘새롭게 된 사람들’의 나라의 특징을 잘 요약해 준다. 심령이 가난한 복된 자들, 즉 자기들의 죄를 한탄하며 의에 목말라 하는 자들은 하나님 나라의 자녀들이다. 그들은 온유한 마음으로 원수에게 긍휼을 베푼다. 간사함이 없는 정직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본다. 핍박하는 자들에게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저주하지 않고 축복한다. 겸손한 마음으로 자기들의 선행을 숨긴다. 그들을 대적하는 자들과 화해하려고 힘쓰고, 그들에게 죄를 범한 사람들을 용서해 준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진심으로 은밀히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께서 상을 주시기를 참을성 있게 기다린다. 자기들의 소유를 보호하기 위해 폭력을 사용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발적으로 그것을 포기한다. 대신 천국에 보물을 쌓아놓는다. 칭찬받기를 피하며 천국에서 누가 가장 큰 자인지 드러내실 주님의 영원한 평가를 기다린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바로 이런 사람들이다!
세상을 닮아가는 그리스도인들
그런데 그리스도인이라는 사람들이 지위와 명성을 얻기 위해 서로 다투는 것을 보고 우리는 뭐라고 말해야 하는가?
그들이 칭찬과 명예에 마음을 빼앗기는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인기를 낚는 어부로 전락해버린 기독교 지도자들에 대해 워라고 말해야 하는가?
교계(敎界) 여기저기서 볼 수 있는 정치적 야심은 또 무엇인가?
좀 더 헌금을 받아내기 위해 그들이 내미는 홍건한 손바닥은 또 무엇인가?
주님의 사업을 한다는 명분 하에 기독교 기관을 세우고 정치인과 기업가들의 지원을 받기 위해 아첨과 교태를 부리는 목회자들의 행태는 또 무엇인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자기중심적으로 사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뭐라고 말해야 하는가?
인기 있는 지도자를 영웅으로 치켜세우려고 열을 올리는 천박한 개인숭배는 또 무엇인가?
복음을 전하는 건전한 설교자로 자처하는 사람들이 부자를 따라가 비굴하게 아부하는 모습을 뭐라고 말할 수 있는가?
이런 질문에 우리는 뭐라고 답해야 하는가? 우리의 대답은 딱 하나이다. 이런 현상들 속에서 우리는 ‘세상’을 본다. 더도 덜도 아니다. 바로 ‘세상’이다. 이런 현상 속에 도사리고 있는 죄가 우리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이다.
타락한 인간 본성의 더욱 추잡한 현상들이 세상 나라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 얄팍한 즐거움을 강조하는 오락 산업, 부자연스럽고 사악한 습관에 빠진 사람들의 호주머니를 털어서 일으킨 기업체, 정상적인 욕구를 왜곡시켜서 무절제하게 만드는 세속 문화, 끼리끼리 모여서 만든 소위 ‘상류사회’, 예수님의 이름을 빙자하여 기관장 개인의 욕심을 차리거나 세상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하나님의 비전과 사역을 들먹이는 일부 기독교 기관들, 이것들이 바로 세상에 속한 것이다. 이것들은 육(肉)을 기반으로 하여 생긴 것이기 때문에 언젠가 육(肉)과 함께 사멸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것들을 피해야 한다. 이런데 동참해서는 안 된다. 두려움 없이, 타협도 없이 여기에 조용히 그러나 단호하게 맞서야 한다.
성령 안에서 살라
세상은 때로 추하고 저급한 모습으로, 때로는 세련되고 교묘한 형태로 나타난다. 어느 경우든지 간에 우리는 그 본질을 꿰뚫어 보고 거부해야 한다. 에녹이 그의 시대에 하나님과 동행했듯이 우리가 우리의 시대에 하나님과 동행하려면 세상을 거부해야 한다. 세상을 단호히 거부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이다.
“너희 간음하는 남자들과 간음하는 여자들아, 세상과 친구가 되는 것이 하나님을 적대하는 것인 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누구든지 세상의 친구가 되고자 하는 자는 하나님의 대적이 되느니라.”(약 4:4)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인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세상에서 난 것임이라. ”(요일 2:15,16)
하나님께서는 이 말씀들을 따를 것인지 아닌지 헤아려보도록 우리에게 말씀을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말씀에 순종하기를 촉구하신다. 그러므로 순종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다.
회개가 터져 나오도록 이끌지 못하는 종교적 감동이나 신자와 세상을 구분하지 않는 신학은 분명히 어딘가 미심쩍은 데가 있다.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조건을 쉽게 만드는 조직적 부흥 운동 역시 미심쩍다.
여기에 대단히 매력적으로 보이는 부흥운동이 있다고 치자. 만일 그것이 의(義)에 기초하지 않는다면, 겸손 가운데 자라나지 않았다면,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다. 만일 육적(肉的)인 것을 개발하여 무엇을 얻고자 하는 운동이라면, 그것은 종교적 사기(詐欺)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러한 종교 사기극을 후원해서는 안 된다. 성령님을 높이고 인간의 자아를 죽여서 무엇을 얻고자 하는 운동만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기록된바, 자랑하는 자는 주님 안에서 자랑할지니라, 함과 같으니라.”(고전 1: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