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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교사의 조건

진정한 교사의 조건


(고전 2:15-16)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16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교회의 교사들이 수고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대로 수고하지 않는 것은 헛된 것이다. 헌신은 두 가지다: 자기 생각에 헌신 vs. 하나님 생각에 헌신하는 것이다. 가장 불쌍한 사람은 자기 생각에는 헌신했다고 했는데 하나님 보시기에 아닌 경우다. 오늘 우리는 어떻게 헌신해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사가 될 것인지 7가지로 나누려고 한다.


1. 십자가를 자랑할 줄 알아야 한다.

-고린도전서는 고린도교회의 문제를 해결하고 건강한 교회로 회복되도록 하기 위해 기록된 서신이다.


*고린도교회의 문제: 분열, 음식, 음행, 은사, 우상숭배...등 이 모든 문제를 일거에 해결할 수 있는 열쇠가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다.

ex.요즘 교회성장 위해 여러 프로그램 시도하지만 교회건강은 십자가 복음 없이 결코 불가능하다.


-기독교교육과 세상교육의 가장 큰 차이점이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다.


-세상이 자랑하는 것들을 자랑하지 않기로 결심해야 한다. 사람이 무엇을 자랑하고 있는지를 보면 그 사람이 무엇을 가치있게 여기는지 알 수 있다. 자랑은 가치관, 가치기준을 보여준다.


*세상이 자랑하는 것들? 1)외모, 2)힘(기술), 3)지식(학벌), 4)소유(물질), 5)행위(선행) ex.고린도교회가 자랑하고 있던 것? 지식 (cf.고전1:22-“유대인은 표적(체험, 기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지식, 학문)를 찾으나”/가치기준의 차이)


-고전2: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세상 앞에서 비난받을 각오를 해야 한다. 미련해지도록 해야 한다.


-십자가의 복음을 붙들어야 한다. *고전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십자가의 복음을 자랑해야 한다. *갈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나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롬1: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우리가 십자가 복음을 자랑해야 하는 이유?


1)십자가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1:18) “구원의 능력”


2)세상이 자랑하는 것은 십자가 앞에 다 무너지기 때문(19-25) - “하나님이 폐하셨다!” (파괴, 좌절, 쓸모없게 만드심) - 오늘날 많은 교회는 하나님이 폐하신 것을 다시 되살리려고 애쓴다.


3)십자가 복음을 통해 죄인을 구원하시고 부르시기 때문이다.(26-29) - 하나님의 부르심의 원칙: 세상의 미련한 것 택하심, 골리앗을 무너뜨리기 위해 다윗을 택하신 하나님. 십자가 복음! 이것이 가장 교회를 교회답게 하는 것이다.

2. 거듭남의 확신을 가져야 한다. (영혼사랑, 구령의 열정)

-행18:9,10절,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


-요3:3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니고데모는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거듭나지 아니하면 예수님의 정체를 온전히 알 수 없다고 대답하신다. 여기서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 자신을 가리킨다.


-고린도에서 사역할 때 사도바울은 영혼의 거듭남을 목표로 사역했다. 사도바울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부르시는 방법은 십자가의 복음인 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십자가외에는 알지 않기로 결심한 것이다.


-교사는 하나님의 백성을 불러내는 법을 알아야 한다. 거듭남의 비결은 오직 십자가 복음으로 죄인을 초청하는 것이다.


3. 성령을 의지할 줄 알아야 한다.

-고전2:3,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행18:5,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하나님의 임재를 철저히 의식할 때 나타나는 심리적 육체적 특징이다!


-사도바울은 헬라철학이나 수사학이나 논리학을 사용하지 않았다. 무식하다 혹은 무관심하다는 비난을 감수하기로 결심했다. ex.초창기 한국교회에서도 무식하다는 말을 듣지 않으려고 유식한 설교를 하려고 애쓴 때가 있었다.

-세상에서 미련한 자가 되기로 결심할 때 하나님 안에서 강해진다. 하나님의 능력을 받는 비결은 세상에서 미련해지기로 결심하는 것이다.


-사도바울이 이같이 결심한 까닭은 하나님의 은혜가 오해되지 않기 때문이다.


4. 지혜의 말씀을 가르칠 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성숙한 신자들의 모임 중에는 “지혜의 말씀”을 전하려고 했다!

-십자가 복음이나 지혜의 말씀이나 모두 성령의 능력으로 가능한 것이다.

-고전 12장에서 성령의 은사(나타남)로 설명된다.


-지혜의 말씀이란 무엇인가?


“은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감취었던 것으로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해 만세전에 미리 정하신 것”(7절)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해 예비하신 모든 것”(9절)


“하나님의 지혜의 말씀은 오직 성령께서 보여주시는 것임”(10절)


“하나님의 깊은 것”(10절)=“모든 것” / 성령께서 알게 해주심


*지혜의 말씀이란? “하나님의 일”에 대한 메시지(11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12절)을 알게 하시는 성령


“영적인 일”을 알게 하시는 성령(13절)


“신령한 자”= 성령으로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일, 하나님의 지혜를 아는 자


“신령한 자”=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자


* 교사가 경계해야 할 것: 인본주의적 가르침, 도덕주의, 율법주의 사람이 어떻게 하면 하나님이 어떻게 반응하신다!


신본주의적 가르침 = 하나님을 반응자가 아닌 시작자로!

믿으면 구원받는다가 아니라 하나님이 부르셨기 때문에 믿는다여야!


5.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가르쳐야 한다. (묵상할 줄 알아야 한다.)

-묵상이란 하나님의 마음을 받는 것이다.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연습이다!


본문 : (시 1:1-6)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3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4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5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 6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지난 시간에 제가 여러분에게 강조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부르심 중에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것은 바로 “하나님을 누리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High Calling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을 누리는 삶이야말로 우리가 힘써 추구해야 할 최고의 가치이자 목표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누리는 삶을 살기 위해 우리는 말씀으로 관계들을 점검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내 안에 풍성히 흘러 들어오려면 묶인 관계를 하나님의 방법으로 풀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누리는 삶의 핵심은 양으로서 선한 목자의 음성을 듣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선한 목자의 음성을 듣지 못한다면 나는 그분의 양이 아닙니다. 내가 그분의 사랑스러운 양으로서 그분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누리는 법을 배우기 위해 우리는 우리의 목자가 어떤 분이시며, 또한 우리는 어떻게 그분의 친 음성을 듣는가를 알고 적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누릴 수 있는가?

오늘은 이 문제를 보다 구체적으로 나눌 것입니다. 좀 더 쉽게 질문해봅시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알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오늘 제가 여러분에게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아가는 첫 단계는 묵상입니다!

왜 묵상이 하나님을 알아가는 시작인가 설명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알 수 있는 통로를 여러 가지로 열어놓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타락했고 죄에 오염되어 있고, 따라서 우리 힘과 지혜만으로는 하나님을 결코 온전히 알 수 없기에 좋으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알 수 있도록 특별한 약을 처방해주셨습니다.

원래 죄가 세상에 들어오기 전에는 사람이 원하면 언제든지 하나님을 알 수 있었고 하나님을 만날 수도 있었습니다. 그것이 창세기 2장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때는 하나님이 지으신 자연과 우주만물을 보기만 해도 하나님의 영롱한 영광을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 왜 우리는 살아가면서 그 영광을 보지 못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죄가 인생에 들어온 이후로 사람의 마음은 어두워졌고 지금도 명백하게 드러나고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우리 주변에서,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에게서, 자연만물 속에서 그분의 놀라운 영광을 보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영과 마음을 치유해야, 그래서 우리 영이 살아나고 우리 마음이 새로워지고 우리의 눈이 밝아져야 할 필요성을 느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영과 마음을 치유하는 말씀을 주셨고, 그것을 기록하게 하셨고, 기록된 말씀을 친히 보존하셔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기록된 말씀은 우리의 영안을 열게 하고 우리의 마음을 밝게 하여 태고 적부터 찬란하게 빛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볼 수 있게 해주는 약입니다.

묵상이란 바로 그 약을 먹는 것입니다. 영어로 묵상이란 meditation인데, 이 말은 라틴어 medikelus에서 비롯되었고, 여기서 ‘약’이란 뜻의 medicine이란 단어가 파생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내 영을 치유하는 하나님의 처방약인 셈입니다. 그러므로 묵상은 그 약을 내 영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강조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묵상이야말로 하나님을 알아가는 시작입니다. 하나님을 누리는 삶은 곧 묵상하는 삶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먼저 우리는 묵상을 왜 해야 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많은 분들이 묵상을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라고 질문하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어떻게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왜입니다. 우리는 왜 묵상을 해야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앞에서 말한 대로 내 영이 치유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내 마음이 어두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씀으로 내 영이 치유되고, 말씀으로 내 마음이 밝아져서 하나님께서 원래 우리를 지으실 때 의도하셨던 바로 그것, 하나님을 누리는 삶, 찬란하게 빛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즐거워하게 되는 것이 우리가 묵상해야 하는 진정한 이유입니다. 또 한 가지 우리가 묵상해야 할 이유는 영적 전쟁 때문입니다.

영적 전쟁은 바로 마음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우리 마음은 영적 전쟁터입니다.

우리의 생각이 바로 전쟁터라는 얘기입니다.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고지를 선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묵상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그것이 하루 일과를 시작하기 전 이른 아침에 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신문을 보고 세상 뉴스를 보고 인터넷을 보면서 수많은 생각들이 우리 생각 안으로 공격해 들어옵니다. 그러나 묵상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 생각의 영역에서 고지를 점령했다면 우리는 넉넉히 승리할 가능성이 훨씬 높은 것입니다.

그러면 묵상이란 무엇입니까?

제가 왜 이런 이야기로 질질 끄는지 아십니까?

묵상이 도대체 무엇이며, 묵상을 도대체 왜 해야 하는지가 명확하지 않으면 묵상은 또 하나의 일이 되고, 부담이 되기 때문입니다.

묵상에 대한 국어사전식 정의는 단순히 “자신의 마음에 무엇인가를 새기는 일”입니다.

우리가 묵상을 왜 해야 하는가를 분명히 하지 않으면 묵상은 그냥 일이 됩니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해보십시오.

만일 우리가 내 마음에 생명을 새기는 것과 죽음을 새기는 것을 선택할 수 있다고 가정해보십시오.

이것은 매우 심각한 문제입니다.

묵상이란 하나님의 생명을 내 영혼에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묵상을 가리켜 하나님의 말씀을 먹는 일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묵상하지 않고 밥을 먹는 사람은 돼지와 같다고 말씀을 들어보았습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을 묵상하지 않고 밥을 먹으면 ‘아, 나는 오늘 돼지가 되었네!’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사랑하는 여러분, 묵상하지 않았다고 여러분 자신을 너무 심하게 정죄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 말씀하는 대로 묵상은 즐거운 것이 되어야 하지, 결코 부담이나 의무나 일로 여겨져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1분만에 밥을 후딱 먹어치우고 출근하고 혹은 등교하는 것처럼 묵상을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묵상은 즐거워야 합니다. 우리가 묵상을 바로 했다면 반드시 즐거움이 있어야 합니다.

왜 그럴까요? 묵상이 일이 아니고 즐거움이 되는 까닭이 무엇일까요?

강조하고 또 강조하고자 하는 부분입니다.

바로 묵상은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사귀는 시간이란 것입니다.

“묵상이란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사귀는 시간이다.”

“묵상이란 하나님과의 친밀감을 갖는 시간이다.”

이렇게 정의야말로 묵상에 대한 가장 정확하고 가장 성경적인 표현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묵상이 일이나 부담이나 의무가 아니라 즐거운 것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 것인지 모릅니다. 그냥 미주알고주알 이야기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그냥 바라만 보아도, 아니 그냥 함께 있기만 해도 즐겁습니다. 묵상은 바로 하나님과 연애하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세상이 줄 수 있는 그 어떤 즐거움과 비교를 불허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에서 예수님 발 앞에 앉아서 말씀을 경청했던 베다니 마리아의 마음속에 있었던 즐거움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 안에 머물러 앉아서 내게 말씀하시는 그분의 음성을 듣는 것! 세상에 이보다 더 달콤하고 더 행복한 시간은 결코 없습니다!

묵상의 개념에 대해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 묵상이 아닌 것들에 대해 설명을 해보겠습니다.

묵상과 비슷하지만 묵상이 아닌 것들이 있습니다.

첫째, 성경공부는 묵상이 아닙니다. 성경공부는 지식욕구를 채우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그러나 묵상은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사귀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묵상이 전부다 그런 뜻은 아닙니다

다만 묵상에 대한 중요성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묵상은 하나님의 친밀감을 경험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성경공부는 신학적 지식과 배경적 지식을 어느 정도 갖추어야 합니다. 그러나 묵상은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묵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령의 감동하심입니다.

물론 성경을 공부할 때에도 성령의 감동이 있고 성령의 깨닫게 하심을 간구하며 의지해야 합니다. 그러나 묵상은 내가 배우거나 깨닫는 것만이 아니라 주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둘째, 명상은 묵상이 아닙니다.

명상은 자기 마음을 비우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묵상은 하나님의 음성으로 내 영과 마음에 가득 채우는 것입니다. 명상은 신비적인 체험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묵상은 하나님과의 인격적 사귐, 친밀한 교제를 추구합니다.

그래서 근본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무엇을 추구하는가? 무엇을 목표로 하는가?

저는 하나님과의 인격적 사귐,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묵상’이라고 부릅니다

묵상은 살아계신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교제하는 것이고, 선한 목자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이 묵상에는 몇 가지 영역이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사귐을 전제로 하면서 크게 네 가지 묵상이 있습니다.

첫째, 말씀 묵상입니다. 기록된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록된 말씀 속에서 주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주님의 음성을 들으며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가장 안전하고 가장 확실하게 하나님을 알고 누리는 방법입니다.

둘째, 자연 묵상입니다.

이것은 주님이 만드신 피조세계를 바라보면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만드신 만물 속에서 주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또 주님의 음성을 들으면서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아시시의 프랜시스가 즐겨 사용한 묵상입니다.

이 자연 묵상은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의도에 가장 가까운 삶의 모습입니다.

셋째, 삶의 묵상입니다. 이것은 내 삶 속에 함께 하시고 실재하시며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면서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15세기 [하나님의 임재연습]이란 책을 썼던 로렌스 형제가 했던 묵상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삶의 묵상은 모든 일에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넷째, 성품 묵상입니다.

이것은 특별히 하나님의 어느 한 성품에 집중해서 묵상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내 성품이 변화되는 가장 강력한 방법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묵상이란 하나님을 누리는 시작인데, 하나님과의 인격적이고 친밀한 사귐을 갖는 시간이란 것입니다.

말씀을 가지고 그런 시간을 가질 때 말씀 묵상, 피조물을 가지고 그런 시간을 가지면 자연 묵상, 삶의 사건이나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어떤 사람을 만났을 때 주님과 교제하는 시간을 가지면 삶의 묵상, 하나님의 특정 성품에 초점을 맞추어서 하나님과 사귄다면 성품 묵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네 가지 묵상 중에 가장 기본이 되고 뿌리가 되는 묵상은 당연히 말씀 묵상입니다.

말씀 묵상이 안 되는데 다른 묵상이 잘 된다면 무엇인가 단단히 잘못된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 묵상만 잘 하는 것은 결코 주님의 뜻이 아닙니다.

말씀은 내 영의 양식이요 치료하는 약입니다.

치료되는 것이 하나님의 모든 뜻이 아닙니다. 치료되면 건강한 몸으로 하나님이 의도하신 목적대로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마찬가지로 말씀 묵상이 결코 전부가 아니라 단지 시작에 불과한 것입니다. 말씀 묵상에서 더 나아가서 모든 관계 속에서, 모든 사건 속에서, 모든 자연만물 속에서, 모든 가정과 직장 속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즐거워하게 되기를 진정 바라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또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할 때 기억해야 할 중요한 것들이 무엇이 있을까요?

“복 있는 사람”은 묵상하는 사람인데, 무엇을 묵상하는 사람일까요? 복 있는 사람, 즉, 하나님의 모든 선하심을 받아 누리는 사람은 무엇을 그 마음에 새기는 사람일까요?

1절에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라는 말씀이 그것을 암시해줍니다. 시편이나 잠언을 보면 언제나 병행구를 유념해야 합니다.

본문에서 복 있는 사람과 악인은 서로 대조됩니다. 그리고 악인의 꾀와 대조되는 것이 바로 의인이 묵상하는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악인의 꾀’란 말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생각’입니다. 그렇다면 복 있는 사람,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누리는 사람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 걸까요?

그가 기록된 말씀을 보면서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 걸까요?

예,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생각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을 누리는 사람은 바로 기록된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생각을 발견하고서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기록된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발견하고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바로 이것이 우리가 말씀을 묵상할 때 발견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발견하지 못하면 우리의 마음은 악인의 마음으로 기울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악인의 생각에 기울어집니다. 그리고 악인의 생각에 내 마음이 영향을 받게 되면 악인의 길에 서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악인과 동행하게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악인의 잔치자리에 함께 앉아 먹고 마시며 즐거움을 누리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생각을 발견하게 되고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되면 의인의 회중에서 하나님을 즐거워하게 됩니다. 사람은 누구나 즐거움을 추구하려고 하는 존재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즐거움을 발견하지 못하면 세상 사람들과 함께 즐거움을 추구하려고 하게 됩니다. 여러분은 어디서 즐거움을 찾고 있습니까?

내가 즐거움을 누리는 것을 보면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저는 저와 여러분이 말씀으로 하나님과 교제하는 일에 즐거움을 누리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내 힘으로는 전적으로 할 수 없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묵상할 능력이 없음을 겸손하게 인정해야 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묵상이 잘 안 된다면 그것에 대해 낙심하거나 자책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면 여러분에게는 묵상할 지혜나 능력이 결코 없기 때문에 당연한 것입니다.

만약 묵상이 잘 되어서 정말 내 영혼이 즐거워하게 되었다면 주님께 영광을 돌리셔야 합니다. 여러분이 지혜롭고 똑똑해서 된 것이 결코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오직 성령의 도우심으로 된 것임을 겸손히 시인해야 합니다.

오직 성령이 아니면 하나님의 마음을 결코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묵상하기 전에 항상 겸손하게 성령을 초청해야 하고 의지해야 합니다. 기록된 말씀을 읽을 때 언제나 성령을 의식하고 의지하려고 하십시오. 그리고 성령을 의지하여 항상 하나님의 마음이 무엇인가를 물으십시오.

성령께서 하나님 아버지의 깊은 것을 계시하여 주실 때까지 그분 앞에 가만히 머물러 앉으십시오.

이것이 말씀 묵상입니다.


마지막으로 이같이 말씀을 묵상할 때 우리에게 좋은 결과들이 많이 주어지게 되는데 우리가 말씀을 묵상해야 하는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첫째, 마음에 즐거움이 찾아옵니다. 말씀을 읽으면서 성령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발견하게 되는 것은 마치 밭에 숨긴 보배를 발견하는 즐거움과 같습니다. 이것은 세상이 주는 어떤 즐거움보다 더 즐거운 것입니다.

둘째, 감정의 기복이 줄어듭니다.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라고 했습니다.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는 그 뿌리를 물가에 두기 때문에 어떤 계절이 와도 열매를 맺습니다.

이것이 묵상하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환경에 따라 흔들리고, 사람에 따라 흔들린다면 여러분의 뿌리를 어디에 두고 있는가를 점검해보셔야 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여러분의 생각과 마음을 하나님의 생각과 마음에 둔다면 여러분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열매를 맺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만약 감정의 기복이 심하다면 다른 사람과의 관계도 어려울 것입니다.

그렇다면 묵상으로 치료받으십시오. 가장 확실한 치유의 방법입니다. 어떤 사람은 묵상하다가 마음의 병이 치유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산책하면서 자연 묵상하다가 주님을 만나고 주님의 음성을 듣고 변화된 것도 보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묵상하다가 성령 충만을 받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묵상은 내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강력하고 확실한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셋째, 묵상하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선하심을 누립니다. 그래서 그는 진정으로 형통한 자, 성공자가 됩니다. 소유나 업적과 같은 세상적인 기준에서의 성공자가 아니라 만족이나 행복이나 즐거움과 같은 하나님의 의도하신 대로의 성공자가 되는 것입니다.


주 안에서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을 알기 원합니까? 하나님을 경험하기 원합니까?

하나님을 누리는 법을 배우기 원합니까?

그렇다면 여기 가장 기초적이고 가장 확실하고 가장 안전하고 가장 강력한 방법이 있습니다. 주께서 주신 기록된 말씀을 가지고 그분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과 함께 앉는 것입니다. 그때 내 마음의 모든 생각들을 완전히 내려놓고 안식함으로써 성령께서 일하실 수 있도록 기회를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앉아서 하나님이 자신의 영광을 계시하시고 자신의 음성을 들려주실 것을 기대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혹시 주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가지려고 하는데 고백해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내 힘과 지혜로는 하나님의 생각과 마음을 알 수 없음을 겸손히 인정합니다. 이전의 어떤 지식이나 경험도 주님 앞에 내려놓고 성령이 말씀하시는 것을 받아들일 준비를 합니다.

앞서 말했듯이 묵상은 지식을 얻는 것도 배우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과 교제하는 것이며, 주님의 영광을 보는 것이며, 주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그런 다음 성경을 펴서 읽습니다.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읽습니다. 읽으면서 마음으로 주님께 여쭙니다. “주님, 저의 삶 속에 말씀하고 싶은 부분이 무엇입니까? 주님의 영광, 주님의 성품, 주님의 원칙, 주님의 의도, 주님의 마음에 대해 내게 하고 싶으신 말씀이 있습니까?” 이때 주님이 떠오르게 하시는 것을 기록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지고 주님과 본격적인 교제를 나눕니다.

“주님, 제게 이 말씀을 주신 까닭이 무엇입니까?

주님, 저의 상황과 이 말씀이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내가 고쳐야 할 생각이 무엇입니까?” 그리고 계속해서 내 감정과 내 상황과 내 고민과 내 염려를 주님께 아룁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계속해서 말씀하여 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진정 즐거운 일이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이것이 진정한 기독교의 희락입니다. 이 희락이 없이 어떻게 기독교적 삶을 말할 수 있단 말입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묵상하는 그리스도인은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그는 복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묵상하는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누리는 삶을 살게 됩니다.

이 묵상의 즐거움을 알고 누리는 복이 올 한 해 저와 여러분의 삶에 가득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으로 저와 여러분에게 이러한 복을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6. 본을 보일 줄 알아야 한다.

-사도 바울의 고백: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다!”

(빌 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이란 예수님의 성품과 원칙을 본받는 삶을 의미한다.


예수님의 삶의 원칙은 어떤 것이었는가?


권리포기의 삶


아버지께 복종하는 삶


상을 위해 사는 삶


겸손과 온유의 삶


십자가와 부활의 삶


구원의 삶


진정한 성공의 의미를 아는 삶


-세상적 성공 vs. 하나님 안에서의 성공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성공임


우리가 구원받은 목적(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소망): 그리스도를 닮는 것


-롬8장: “모든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푯대이다: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고, 어떤 원칙으로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대답


-예수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는 위험하다! 예수 없는 기독교인이 되지 말라!


-내 모든 삶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어야 한다.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나를 통해 그분을 보게 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살아가야 하는 궁극의 이유이다.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삶은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삶이다.


-나는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예수님의 사고방식을 본받으면 예수님처럼 살게 될 것이다.


-세계관>가치관>신념>사고방식>습관>행동>인격>운명



7. 협력할 줄 알아야 한다. (하나됨을 이루어야 함)

-하나님의 능력은 팀이 하나가 될 때 나타난다.


-행18:5절,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부터 내려오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언하니”


-아굴라, 브리스길라, 실라와 디모데와 동역할 때 큰 능력이 나타남

(마 20:25-28)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26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27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사람의 욕구


-자기 필요와 욕구에 민감한 존재, 자기를 사랑함


-자기를 높이려는 욕구: 성공과 명예에 대한 갈망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진정으로 높아지는 비결에 대해서 말씀해주신다.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방식과 정반대의 방식을 소개하신다.


본문의 상황


-세베대의 아들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찾아가 부탁함


-숨겨진 사고방식: 높은 사람이 높여주면 높아질 수 있다! 줄을 잘 서야! 높은 사람에게 잘 보여야! 요행으로 성공 가능하다!!


섬김을 받고자 하는 사람 vs. 섬기려는 사람

-세상 나라와 하나님 나라의 차이




섬김이란 필요를 채우는 행위이다.


-나의 필요: 육의 필요, 정서적 필요, 육체적 필요, 생활의 필요, 영적 필요


-남의 필요


-주님의 필요: 주님의 이름, 나라, 의, 계획과 뜻이 성취될 필요, 복음전파




섬기는 사람이 되려면?


-나의 필요에 대해 해결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남의 필요에 대해 반응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주님의 필요를 발견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예수님의 섬김에 대해서?


-높아지려고 함이 아니라 낮아지려고 하심: 철저히 아버지를 신뢰하심!!


-받으려고 함이 아니라 주려고 하심


높아지는 방법?


1.세상적인 사고방식과 반대방식으로!(25절)


2.하나님이 높이시도록 하라. 높이고 낮추심은 하나님 손에 달렸다!!


3.하나님이 높이시도록 하기 위해 낮아지라.(27절)


4.받고자 하면 주려고 하라.(26절)


5.예수님을 모델로 삼으라!(28절)

높아지려고 했다가 낮아진 한 사람, 진정으로 높아지는 법을 배운 한 사람, 베드로의 고백과 권면을 들어보자! 청년들에게 주는 베드로의 권면: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종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벧전5:5)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벧전5:6)


-베드로는 어떤 사람이었는가? 그는 높아지려고 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십자가를 통과하면서 베드로는 실패를 통해 낮아지는 법을 배웠다. 자신이 제자들 중에 수제자임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던 그였다. 어느 누구보다 주님을 사랑한다고 자부심을 가졌던 제자였다. 그러나 십자가를 통과한 베드로는 어느 누구보다 낮아졌다. 어느 누구보다 겸손해졌다. 자신의 섬김과 수고에 대해 대가와 보상을 기대하지 않았다. 베드로는 ‘빚진 자의 마음’을 가지고 맡겨주신 사역에 충성했다. 베드로는 높아지려고 했던 사람이었지만 십자가를 지나면서 진정으로 높아지는 법을 배웠다. 높아지는 것은 하나님이 높이시는 것이고, 하나님 앞에서 진정으로 낮아질 때 가능하다는 사실을 온 몸으로 배웠다.


-베드로는 목회하면서 혈기와 열정으로 가득 찬 젊은이들을 보면서 젊었을 때 자신을 생각했을 것이다.


-베드로 사도가 가르치는 오늘 기독 청년들이 배워야 하는 것


1.순종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2.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준비)


3.은혜를 사모하라.(하나님이 높여주시는 것을 온전히 기대하라)


4.하나님의 손 아래 있으라.(하나님이 낮추시는 것을 경험하라.)


5.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라.


6.하나님의 주권을 믿으라. ex.감옥에 갇힌 요셉을 기억해보라.


청년 그리스도인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겸손히 낮아지는 법, 종으로 낮아져서 섬기는 법, 자기의 필요보다는 남의 필요에 민감하고, 더 나아가서 주님의 필요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높아지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


섬기면서 살자! 섬김의 사람이 되자! 이것은 결코 우리가 메조키스트로서 살아가자는 말이 아니다. 이것은 진정으로, 참된 의미에서 높아지는 삶이다. 성공과 명예를 열망하는 것 만큼, 우리는 겸손과 섬김의 삶을 배워야 한다.


여기 그 모델이 있다. 앞서가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분은 우리가 뒤따라가고 본받아야 할 진정한 모델이시다! 그분은 높아지기 위해서 낮아지려고 노력하셨다! 그분은 진정으로 높아지는 비결을 알고 계셨고, 온 몸으로 실천하셨다!


오늘 우리가 기억해야 할 한 가지 진리가 있다. 그것은 “높이는 일과 낮추는 일은 오직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높이신다. 처음에 높아지는 것은 낮추기 위함이고, 처음에 낮추시는 것은 높이시기 위함이다! 지금 높아지는 것을 좋아하지 말라. 두려운 일이다. 젊을 때 낮아져야 한다. 그래야 젊음이 지나갈 때 높아짐이 있다. 아니 평생 낮아져야 한다. 그럴 때 영원히 높아짐이 있을 것이다.


나가는 말


고린도교회는 성령과 말씀에 붙잡힌 사도의 십자가 복음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떠난 뒤 고린도교회는 어떻게 복음을 받았는지 까맣게 잊어버리고 성령의 능력보다 세상의 지혜를 더 의지하고, 십자가의 복음보다는 세상의 철학과 수사학과 논리학을 더 의지하려고 하고 있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향하여 강력하게 호소하고 있다! “너희가 십자가 복음을 자랑하고 있는가?” “너희가 십자가 복음을 부끄러워하고 있지 않는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라” “어디서 떨어졌는지 생각하라” “다시 십자가의 복음, 성령의 은사로서의 하나님의 지혜의 말씀을 붙들라”


-진정한 교사의 조건은 세상적으로 미련해지기로 결심하는 것이다. 이것이 참된 헌신이다. 그리고 십자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기로 결심하는 것이다. 그럴 때 성령의 능력이 임한다. 하나님의 성령에 붙들리는 것이 헌신이다. 성령에 붙들려서 십자가 복음을 자랑하는 것,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은혜로 행하신 일들이 무엇인지 담대하게 가르치고 전하는 것, 이것이 헌신된 교사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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